「말과 말들」은 워크룸 프레스의 구글 크롬 확장 프로그램입니다. 새 창을 열 때마다 워크룸 프레스와 작업실유령 도서의 인용문을 출력합니다. 내려받기

모든 것이면서 아무것도 아닌 것 (개정판)
온라인 판매처

모든 것이면서 아무것도 아닌 것 (개정판)

안규철

안규철 작가의 『모든 것이면서 아무것도 아닌 것』 개정판이 출간되었다. 2014년 초판이 출간된 이후, 지난 8년간의 작업과 글, 주요 평론이 더해진 이번 개정판은 1992년 첫 개인전을 연 이래 한결같은 모습으로 우리 미술계를 지켜 온 안규철 작가의 지난 30년의 작가적 여정을 망라한다.

삶과 예술의 문 앞에서 아무것도 아니면서 모든 것을 해 온 안규철의 30년

미술의 잠재력 가운데 하나가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의 이면을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이라면, 지난 30년간 안규철만큼 그 작업을 성실히 수행해 온 작가를 찾기란 쉽지 않다. 미술이 지닌 급진성 가운데 하나가, 시대를 향해 깨어 있는 질문을 던지는 데 있다면 그 역시 안규철만큼 성실한 질문자를 찾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매일아침 책상에 앉아 작업 노트를 써 내려가며 하루를 시작하는 그에게 질문은 미술에 선행하는 행위다. “동시대의 소모품으로 쓰이기를 거부하고 시대의 요구에 다르게 응답하는 것, 다른 방식으로 가치 있는 삶을 실천하는 것”이야말로 그가 미술을 하는 이유이기 때문이다.

1977년 서울대학교 조소과를 졸업하고 1980년부터 7년간 『계간미술』 기자로 일하며 현실의 미술과 부딪힌 그는 1985년 무렵 ‘현실과 발언’에 참여하며 작가로서 자신을 의식하기 시작했다. 모더니즘과 민중미술의 이념이 첨예하게 부딪혔던 당시, 한국 미술계에 범람하던 기념비적 조각에 맞서 ‘이야기 조각’, ‘풍경 조각’이라 불리는 미니어처 작업을 선보이던 안규철은 1987년, 서른세 살의 나이에 불현듯 유럽으로 유학을 떠난다.

이념 싸움에 골몰하던 답답한 현실을 벗어나 “미술이 더 근본적으로 지금의 시대 전체에 대한 비판적 관점을 가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선택한 유학에서 그를 기다리던 것은 그러나, 유럽과 우리나라 사이에 놓인 커다란 시차(時差)였다. 이미 20여 년 전에 68혁명을 겪은 그곳에서, 1980년대 민주화운동의 절정기에 바다를 건너온 이방인은 지금까지 자신이 지녀 온 미술의 언어를 버려야 했다. 초기작 「무명작가를 위한 다섯 개의 질문」(1991/2021)은 그 과정에서 나온 산물이다.

방 안에 두 개의 문이 있다. 하나는 ‘예술’이라는 단어가 적힌, 손잡이가 다섯 개인 문이고, 다른 하나는 ‘삶’이라는 단어가 적힌, 손잡이가 없는 문이다. 손잡이가 없으니 삶의 문으로는 아예 나갈 수가 없고, 예술의 문으로 들어가려 해도 손잡이가 다섯 개나 되니 난감하기는 마찬가지인 상황. 방에는 화분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다. “화분 속에서 자라고 있는 것은 식물이 아니라 다리 하나가 터무니없이 길게 성장하여 줄기 역할을 하는 불안정하고 앉을 수 없는 나무 의자”다.

그로부터 30년이 흐른 2021년,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작가 가운데 하나가 된 그는 지난 시간을 돌아보는 회고전 『사물의 뒷모습』(국제갤러리 부산, 2021)을 치르며 다시 이 작업을 선보였다. 더 이상 무명작가가 아닌 지금까지도 그는, 삶과 예술의 문으로 들어가지 못한 채 방을 서성이며, “죽은 나무를 심고 계속 물을 주고 가꿔서 다시 자라게 하는, 그런 부조리하고 불가능한 일”을, 달리 말해 아무것도 아니면서 모든 것을 하고 있다.


발췌

앞만 보고 달려 온 지난 시간 동안 나를 움직여 온 동력은 무엇이었나. 첫 개인전에 내놓았던 망치와 구둣솔과 외투를 30년의 거리를 두고 바라보고, 사진만 남아 있는 설치 작품들을 모형으로 복원하면서 그 작업들을 관통하는 질문이 무엇이었는지, 그것은 아직 유효한지를 자문해 보았다. — 「개정판 서문」(2022) 중에서

예술가들은 언제나 당대를 넘어서 인간과 역사 전체를 바라보고 자신의 삶과 세계 전체를 사유하는 존재가 되기를 꿈꾸었다. 동년배들 대다수가 공과 대학과 경영학과로 진학하던 시절에 미술을 택했고, 미술이 현실에 직접 복무하지 못하는 것을 부끄러워했던 나에게도 그것은 여전히 유효한 목표이다. 동시대의 소모품으로 쓰이기를 거부하고 시대의 요구에 다르게 응답하는 것, 다른 방식으로 가치 있는 삶을 실천하는 것, 그것이 내가 미술을 하는 이유이다. — 「동시대를 넘어서」(2020) 중에서

만약 우리 미술계에 어떤 중심이나 주류가 있다면 나는 계속해서 그 외곽에 머물러 왔다고 말할 수 있다. 이제 그것이 내게 주어진 역할이라고 믿고, 하던 일을 계속할 수밖에 없다. 서두를 것도 없고 주변을 의식할 일도 없다. 모든 작품은 하나하나가 도전이고 모험이다. 그것은 언제든 실패할 수 있다. 다만 미술 작품이라는 물고기를 키우는 내 저수지에 계속 신선한 물과 양분을 공급하는 일에 한결같은 정성을 들일 뿐이다. — 작가 노트

미술 작품이 그런 아름다움을 감각적으로 재현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내가 하고 있는 것은 미술이 아닌지 모른다. 그러기에는 나의 작업과 관심사들은 너무 세속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런 아름다움이라면 달빛이나 바람, 노을이나 바위 같이 지금 있는 것들로 충분할 것 같다. 거기에 무엇을 덧붙일 수 있을 것인가. 막연하지만, 자신의 궤도를 가고 있는 달이 사람의 마음을 뒤흔들고 잠 못 들게 하듯이, 하나의 작품, 한 사람의 영혼의 궤적이 그런 빛을 저절로 발하는 그런 상태를 꿈꾸어 본다. 그러기 위해서 미술은 오히려 아름다움을 잊는 편이 나을지 모른다. — 작가 노트

내게는 미술을 하면서 계속해서 미술을 의심하는 병이 있다. 범람하는 이미지의 강력한 힘 앞에서 수공업적 이미지 생산자로서 무력감을 느끼고, 자본과 경제가 지배하는 현실 속에서 미술의 역할에 대해 회의한다. 이미지를 다루면서도 실상을 가리고 왜곡하는 이미지의 수상쩍은 속성을 경계한다. — 「나의 작가적 전개 과정에 대해」(2004) 중에서

현실 세계는 우리의 소망들을 번번이 좌절시키는 세계이다. 평화로운 삶, 억압과 착취가 없는 세계에 대한 꿈은 항상 이러저러한 현실적 이유들로 인해 무산되고 지연된다.그것은 원인과 결과 사이의 인과관계로 구성된 세계이고, 우리의 사고와 행동을 지배하며 우리를 체념과 탄식에 익숙하게 만드는 세계이다. 내게 있어서 만화적 상상력은 이러한 세계로부터의 탈주를 꿈꾸는 힘이며, 그런 점에서 불온하고 무정부적인 상상력이다. — 「나의 미술 작업과 만화적 상상력」(2003) 중에서

나는 오늘날 ‘나를 잡아 주시오’ 하고 아예 사냥꾼들을 찾아다니는 젊은 토끼들 틈에서 그처럼 쉽게 포획당해 버리고 순순히, 아니 기꺼이 방목장의 철책 속에 갇히는, 재미없는 토끼는 되고 싶지 않다. (...) 쫓고 쫓기는 이 게임을 통해서만 나와 나의 사냥꾼들은 세상이라는 숲의 구석구석을 헤집고 다니며 이름 없는 꽃과 나무와 골짜기들을 새로이 발견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나는 달아난다. 외람되지만 나를 잡아 보라. — 「그림, 요리, 사냥」(1992) 중에서


차례

개정판 서문
초판 서문

안부를 전하는 편지 / 김해주
동시대를 넘어서 / 안규철
개념 미술의 시적 변환: 안규철 전시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를 중심으로 / 이찬웅
무한한 현존 / 보리스 그로이스
안규철, 세상에 대한 골똘한 관찰자 / 우정아
사물들: 위반의 미학 / 김성원
대화 / 안규철·김선정
사물과 언어 사이를 가로지르기로부터 예술의 효용성으로 / 최태만
언어 같은 사물, 사물 같은 언어 / 이건수
삶의 부재를 사유하는 공간 / 안소연
나의 작가적 전개 과정에 대해 / 안규철
작가적 슬럼프의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한 일곱 가지 작업 / 안규철
나의 미술 작업과 만화적 상상력 / 안규철
바깥의 ‘흔적’을 담은 메타 미술 / 윤난지
시(詩)와 자: 안규철의 조각 / 박찬경
그림, 요리, 사냥 / 안규철

도판 목록 및 작가 노트
출처


저자 소개

1955년 서울에서 태어나 외과의였던 아버지를 따라 춘천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홉 살 때 부모님 곁을 떠나 서울로 유학 온 안규철은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 입학해 조각을 공부했으며, 1977년 졸업 후 『계간미술』에 들어가 7년간 기자로 일했다. 1985년 무렵 ‘현실과 발언’에 참여한 그는 당시의 기념비적 조각 흐름을 거스르는 미니어처 작업을 선보였으며, 1987년 서른셋의 나이에 프랑스 파리로 유학을 떠났다. 이듬해인 1988년 독일로 건너가 슈투트가르트 국립미술학교에 입학해 수학 중이던 1992년, 스페이스 샘터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열며 미술가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1995년 귀국 이후 『사물들의 사이』, 『사소한 사건』, 『49개의 방』, 『무지개를 그리는 법』, 『모든 것이면서 아무것도 아닌 것』,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 『당신만을 위한 말』,
『사물의 뒷모습』 등의 개인전을 열고 국내외 여러 기획전, 비엔날레 등에 참여하며 일상적 사물과 공간에 내재된 삶의 이면을 드러내는 작업을 발표하는 한편, 1997년부터 2020년까지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저서로 『그림 없는 미술관』, 『그 남자의 가방』, 『아홉 마리 금붕어와 먼 곳의 물』, 『사물의 뒷모습』 등이, 역서로 『몸짓들: 현상학 시론』,『진실의 색: 미술 분야의 다큐멘터리즘』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