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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 vs. 패션
절판

패션 vs. 패션

박세진 지음

패션은 어떻게 무의미해지는가

도미노 총서 3권으로 출간된 『패션 vs. 패션』은 패션을 렌즈 삼아 세상을 바라본다. 그런데 이 책은 처음부터 패션이 무의미해지고 있다고 말한다. 독자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그런 말을 미끼로 던지고 반전을 꾀하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최근의 패션은 예전만큼 흥미롭지 못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예전’은 1980년대와 1990년대, 조금 더 넓게 보자면 2차 대전 이후부터 21세기 전까지를 말한다. ‘흥미롭다’는 말은 그래도 한때 소수의 디자이너들이 신선한 실험을 시도했고, 그게 세상 여기저기에 널리며 어떤 현상을 만들거나 하위문화와 함께하는 등 문화 측면에서 분투를 했고, 더불어 그런 와중에 어떤 이들은 운 좋게 돈도 좀 벌었다는 의미다.” 이 책이 흥미로워지는 건 바로 이 부분부터다. 패션이 재미없어지는 시점이 세계가 후기 자본주의 시대로 돌입하는 시점과 정확히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 책의 1부는 온전히 패션이 어떻게 무의미해지는지 그 과정을 따라간다. 가령 패션 ‘디자이너’ 질 샌더와 ‘브랜드’ 질 샌더가 사람 따로 이름 따로 떠돌아다니며 서로 ‘질 샌더’라는 이름이 붙은 옷을 내놓는 모습은 패션 세계에서 소위 브랜드가 소비되는 방식을 보여주고, 한창 잘 나가던 슈퍼스타 디자이너 알렉산더 맥퀸(1969~2010)의 죽음은 패션 산업의 냉혹한 면모를 드러낸다. 결국 2010년대 들어 정신을 차리고 보니 패션에서 재미라든가 실험 따위는 사라지고, 우리가 맞닥뜨리는 건 LVMH나 케링 같은 거대한 패션 제국, 대차대조표에 따라 움직이는 경영인들의 숫자 놀음, 그에 따른 가차 없는 퇴출, 초거부들을 위한 개인 패션쇼뿐이다.

21세기의 유니폼, 패스트 패션

그러나 “이런 사회 및 패션 산업의 변화 속에서 패션이 평범한 이들의 삶에서 멀어져가고 있음에도 옷이란 너무나 가까이에” 있는 존재라는 점은 달라지지 않는다. 한마디로 인간은 옷을 입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것이다. 2부는 그런 의미에서 사회적 옷 입기, 즉 스타일과 코스프레에 대한 이야기로부터 시작한다. “우선 스타일이라는 단어가 패션에서 사용되는 방식을 말해보자면 ‘옷과 삶이 일치되어 연동되는 상태’ 정도로 말할 수 있다. 패션 디자이너 이브 생 로랑이 ‘패션은 사라진다, 하지만 스타일은 영원하다’는 말을 한 적이 있는데 여기에 사용된 스타일이 같은 의미다.” 이와 대비해 이 책에서 말하는 코스프레는 스타일과 대척점에 있는 ‘상황에 따른 옷 입기’다. 관혼상제 때 의례히 정해진 옷을 입는다든가 데이트 때 잡지에서 추천한 옷을 고른다든가 하는 건 모두 “시간과 장소, 상황에 맞는 옷을 고르는 행위이고 자신의 스타일에서 발아한 게 아닌 이상 일종의 코스프레다.” 둘 모두 동기에 의해 나눠지는 사회적 옷 입기에 해당하고 어느 쪽이 낫다고도 할 수 없다. 문제는 둘 중 하나를 고를 수 있는 선택의 폭이 점점 좁아지는 현실이다. 즉 가처분소득이 뻔해지고 있는 요즘, 우리는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 안전한 선택, 즉 코스프레를 향한다.

“이 과정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며 결국 염가의 코스프레 브랜드가 정상의 자리에 서게 되는 과정을 우리는 전후 일본에서 아메리칸 캐주얼이 정착하는 과정을 통해 엿볼 수 있다. 즉 세계시민이 되며 표준 복장의 필요성이 도래하고, 회복된 경제 상황 속에서 스타일과 만듦새에 초점을 뒀던 보다 여유로운 VAN, 이후 이걸 훨씬 저렴하게 압축 재생산해 아메리칸 캐주얼을 실어 나른 유니클로의 이야기다.” 나아가 저자는 괜히 옷 때문에 고민하지 말고, 21세기의 유니폼으로 패스트 패션을 받아들이고, 패션에 쓸 돈이 있으면 다른 문화생활을 즐기라고 충고한다.

패션과 옷의 또 다른 길

여기까지만 본다면 이 책은 패션에 흥미를 붙여주는 대신 정나미가 떨어지게 하는 책에 가까울 텐데, 저자의 속내가 아주 그렇지만은 않다는 사실이 3부에서 드러난다. 사회에서 비주류로 받아들여지는 패시티 패션과 롤리타 패션을 소개하며 기호나 취향으로서 패션이 가지는 의미를 말하고, 몇 년째 지겹게 이어지는 패딩 유행과 관련해서는 거의 실용서에 가까운 분석과 구매 가이드를 제시하기도 한다. 또한 YG 엔터테인먼트와 SM 엔터테인먼트에 속한 아이돌 그룹의 의상을 정밀 분석하는 대목에서는 패션을 즐기는 또 다른 재미와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으며, 칼 라거펠트가 샤넬에서 선보인 2015년용 봄여름 컬렉션이 페미니즘이라는 커다란 조류와 어떻게 연동되는지 밝힘으로써,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대의 흐름과 함께하는 패션의 본질을 보여준다. 패션이 무의미해지고 있다면, 그건 아직 우리 시대를 규정하는 무언가가 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음을 뜻할지도 모른다. 저자의 말마따나 미래의 패션이 어떤 모습일지 우리는 아직 알지 못하고, “그러므로 그 어떤 일탈도 여전히 가치가 있다.”

도미노 총서에 대하여

2011년 창간 때만 해도 『도미노』에 주목하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주목한다 한들 그 정체를 말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만큼 형식과 내용, 편집 동인과 필자 등 모든 면에서 낯선 잡지였다. 그러나 거기에 실린 내용마저 무시할 수는 없었다. 제도나 권력의 부름을 받지 않은 일군의 젊은 필자들이, 현재 그들이 처한 상황을 고민하고, 세상을 향해 발하는 자생적인 목소리. 성 소수자, 페미니즘 등 다양한 관심사를 가진, 그러나 같은 곳을 바라보는 필자들이 내놓는 독특한, 가볍거나 무거운, 뜨겁거나 차가운 목소리는 디자이너 듀오 홍은주 김형재의 손끝을 거쳐 세상에 나왔고, 문화계 변방에서 외연을 넓혀온 ‘독립 잡지’ 특유의 에너지를 내뿜으며 호를 거듭할수록 주목을 받았다.

『도미노』가 창간된 지 어느덧 5년, 그 시간 동안 무엇이 달라졌을까. 우선 그들이 꾸준히 탐색해온 세상의 수상한 움직임들이 점점 현실화되었다. 2000년대 말부터 격화하기 시작한 신자유주의 시대의 균열은 점점 커다란 파열음을 내고 있으며, 늙어가는 세대는 청년들이 사라진 자리에서 청년들을 찾는다. 우리는 IS의 등장이나 브렉시트와 함께 전 세계적 시스템의 붕괴를 두 눈으로 목격하고 있으며, 상식이 통하지 않는 소통과 혐오를 피부로 느끼며 살아간다. 기존 제도는 새로운 무언가가 나타나 이 혼란의 밧줄을 끊어주길 (혹은 끊어진 밧줄을 이어주길) 바라지만, 새로움에 대한 강박에 짓눌려 그 공식만을 답습하는 모습을 우리는 목도하곤 한다.

이제 도미노는 전열을 정비하고 총서의 형태로 세상에 선을 보인다. 인문, 사회, 문학, 미술, 여성사 등 『도미노』가 다뤘던 거의 모든 이슈를 총괄하며,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줄 것이다. 그동안의 활동을 갈무리하고, 다가올 시간을 맞이하며, 다양한 문화를 이야기하고, 새로운 것이 아닌 필요한 임무를 수행하는 총서가 될 것이다.


발췌

2009년을 기준으로 보자면 그해 가을겨울인 FW부터 2011년까지 매우 이상한 다섯 번의 시즌이 찾아왔다. 온워드 홀딩스의 질 샌더 그룹은 공식적이고 법률적으로 ‘질 샌더(JIL SANDER)’라는 이름을 사용하며 라프 시몬스가 디자인한 질 샌더를 계속 선보였다. 라프 시몬스는 아마도 질 샌더라는 브랜드가 만들어낼 법한 이미지를 가지고 질 샌더라는 브랜드 로고를 달고 컬렉션을 만들면서 그 이름을 더욱 공고히 한다. 하지만 정작 프라다에서 쫓겨난 진짜 질샌더는 유니클로의 모회사인 패스트 리테일링 소속으로 자신의 작품을 선보인다. (…) 긴 시간이 흐른 후 만약 이 옷들이 발굴된다면 패션사를 연구하는 학자는 과연 어느 쪽을 질 샌더의 옷으로 평가하고 어느 쪽에 ‘유사 질 샌더’의 딱지를 붙일까.

LVMH를 예로 들면 가방은 루이 비통부터 아래로, 옷은 로로 피아나와 디오르부터 아래로 내려가는 위계질서를 구성한다. (…) 루이 비통 가지고는 에르메스 정도의 고급 느낌이 나지 않기 때문에 LVMH는 서류상으로만 남아 있던 소위 로열 패밀리의 브랜드 모이낫을 사들여 재론칭했고, 이걸로도 약간 모자라다 싶었는지 최고급 캐시미어로 유명한 로로 피아나도 사들여 최상급 의류 라인을 확보했다. 이건 마치 미드필더가 약하니 분데스리가에서 잘나가는 누구를 데려오자거나, 한국에 스카우터를 보내 투수진을 보강하자는 식의 프로스포츠 리그들의 움직임과 다를 게 없기도 하다.

톰 포드는 패션에 흐릿하게 남아 있던 영속성의 불길을 완전히 잠재웠고 패션이 혹시 예술 비슷한 건 아닐까 의심하던 식자들에게 “아니야”라는 10조 원쯤 되는 크기의 목소리로 답을 내놨다. 이건 물론 톰 포드 혼자 만들어낸 시장의 모습은 아니다. 큰 회사에서 괜찮은 연봉을 받으며 안정된 생활을 하던 사람들, 음악 등 대중 예술로 갑자기 거부가 된 스타 등등이 최상류층 흉내내기에 어느 정도 질려가고 있었고 새로운 롤 모델, 스타일 모델을 찾고 있었다. (…) 1900년대 초중반 기나긴 전쟁이 끝나면서 랑방이나 샤넬, 디오르 같은 디자이너들이 최상층을 차지했고, 이제 유한계급의 시대가 저물어가고 후기 자본주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톰 포드 같은 디자이너들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동일한 가처분소득을 가지고 있다면 우선 써야 하는 곳은 당연히 필수품들이다. 스타일에 대해 생각할 여유가 사라지고 실패했을 경우 회복해야 할 기회비용이 더욱 커지면서 사람들은 모험을 두려워하게 된다. 간단히 말해 자기 맘에 드는 A와 회사 다닐 때 입을 B가 있는데 A, B 둘 중 하나밖에 못 산다면 선택은 B다. 그게 싫다고 회사를 떠나면, 특히 21세기 한국 사회라면 다시 정상 루트로 복귀할 길이 묘연하다. 회사도 잡고 A도 가지고 싶다면 극복해야 할 정신적 에너지가 과도해진다. 그러므로 어느새 아예 마음속으로 처음부터 선택지는 B로 세팅된다. 실험적인 디자이너들이 사라진 자리에 남는 것은 기존 레시피를 두고 벌어지는 치열한 경쟁뿐이다.

현재를 과도기 상황으로 인식하고 유니클로 시그널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는 건 유력한 방법이 될 수 있다. 즉 유니클로를 입고 있으면 ‘아, 저는 옷을 입어야 한다니까 입고 있습니다만, 유니클로를 입고 있으니 저 따위로 옷을 입고 있다니 하는 생각은 말아주세요’라는 신호를 보내는 거고 받아들이는 사람도 ‘아, 쟤는 유니클로를 입고 있으니 코디나 옷 쇼핑에는 별 관심이 없고 다른 재미있는 걸 하고 있겠구나’라고 생각하는 사회적 동의가 성립된다면 모두가 득을 보는 이상적인 균형 상태가 만들어진다. (…) 마지막으로 왜 하필 일제냐 같은 반론이 어딘가에서 있을 수 있는데 이것은 글로벌 규모의 작업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비행기를 타고 어느 나라에 떨어져도 ‘아, 쟤는 유니클로를 입은 애구나’라는 마찬가지 평을 들을 수 있다면 심지어 세계의 안정에도 작게나마 이바지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유니클로 정도가 이런 일이 가능해 보인다.


차례

들어가며
서문: 패션을 바라보는 눈

1부 패션은 어떻게 무의미해지는가
질 샌더 대(對) 질 샌더
알렉산더 맥퀸의 죽음
톰 포드, 사라지는 패션
잉여의 종말

2부 옷은 어떻게 유의미해지는가
스타일과 코스프레
VAN, 복제 착탈식 패션의 프로토타입
패스트 패션의 도래

3부 패션과 옷의 또 다른 길
페티시와 롤리타, 망가진 마음의 힘
패딩 전성시대
케이(K), 패션의 미래가 될 가능성
비싼, 페미니즘

맺으며 어제의 옷, 내일의 패션
찾아보기


지은이

박세진은 잡지 등의 매체에 패션에 관련된 글을 쓰고 번역을 하고 있다. 패션붑(Fashionboop.com)이라는 사이트를 운영하며, 2011년 시작된 비정기 문화 잡지 『도미노』 동인으로 활동했다. 옮긴 책으로 『빈티지 맨즈웨어』(2014)가 있다.


편집

박활성

디자인

홍은주 김형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