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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스 프라이스 개새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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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스 프라이스 개새끼
Fuck Seth Price

세스 프라이스 지음, 이계성 옮김

미술, 음악, 패션, 저술 등 다방면으로 작업을 펼쳐 온 작가 세스 프라이스의 『세스 프라이스 개새끼』가 출간되었다. 공식 석상에서 언급하기 다소 부적절한 단어가 제목에 포함된 이 책(원제는 ‘Fuck Seth Price’)은 자전 소설의 형식을 빌려 지적인 무게, 패션의 화려함, 월가의 도박성을 모두 갖춘 현대 미술계의 매혹과 모순을 그린다.

“미술계에 대한 단연 최고의 묘사”

그녀는 언제부터인가 꿈속처럼 세상을 떠돈다. 그런 그녀의 몸은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기묘하고 끔찍한 일들을 벌인다. 살인, 납치, 그 밖의 수상한 행동들. 그녀는 내면에 침잠한 채 자신의 행동을 유심히 관찰하며, 남아도는 시간에 (행동에 관여할 필요가 없으므로) 도대체 어디서부터 모든 것이 잘못되었는지 깊은 고민에 빠진다. 지금은 그만둔, 그녀에게 화려한 성공을 안겨준 미술에 관해. 이탈리아-아메리카 음식과 같은 길을 걸은 추상화에 관해. 앞뒤 안 맞고 기괴하고 말이 안 되는 글이 가볍게 허용되는 미술계 글쓰기에 관해. 작가 초년생 앞에 열린, 겉보기에는 누구나 입장 가능한 문들에 관해. “아부쟁이, 한물간 사람, 안달 난 사람, 질척대는 사람, 프리랜서 백수”처럼 떠도는 영혼으로 가득한 미술 사교계에 관해. “돈 많고 성공한, 장난감들로 가득한 커다란 작업실을 가진 주로 남성 작가들에게서 발견되는” 작업 동기에 관해. “아원자 입자처럼 불규칙적이고 예측 불가능하기는 해도 그저 또 하나의 상품이 되고” 마는 작품에 관해. 예컨대 “폭스콘 노동자가 코카콜라를 쏟은 나이지리아 전통 천을 스캔해, 포토숍에서 임의로 작업한 결과물을 벨기에산 린넨에 인쇄한 뒤 진공 성형된 캔버스 틀에 고정한 작품”처럼 어떤 방법을 택하든 결과물은 다 비슷비슷해서 사실 제작 과정이 그리 중요하지 않은 그녀의 작품에 관해.

“현대 미술과 문학에 대한 깊숙한 선언”

이윽고 “한 아파트 건물의 열린 뒷문으로 몰래 들어가, 쓰레기 처리장에서 일하던 관리인의 목을 조른 뒤, 비상계단을 올라 12층으로 가는 동안” 그녀의 의식은 컴퓨터와 네트워크, 영화의 역사로 이어지고, 미술을 둘러싼 문학, 금융, 건축, 기술의 영역을 배회한다. 이를테면 그녀가 보기에 “시를 조각이라고 본다면 소설은 회화에 해당했다.” 회화와 마찬가지로 소설 또한 말끔한 벽과 테두리를 요구했고, 여기에서 벗어난다고 실패한 소설은 아니었지만, 바닥에 놓인 그림을 보고 사람들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조각으로 취급하는 것처럼, 시처럼 여겨질 뿐이었다. 나아가 무엇이든 다른 무언가로 변신할 수 있는 현대 미술의 특성은 점점 더 예측하지 못한 영역으로 그녀의 의식을 이끌고, 이제 우리는 모든 예술의 근본이었던 자아와 마주하기 힘든 시대로 접어들었음을 깨닫게 된다.

미술로서 문학, 혹은 문학으로서 미술

7개 국어로 번역되며 미술계에 반향을 일으켰던 에세이 『확산』(Dispersion, 2002)을 쓴 이래 세스 프라이스는 “오랫동안 소설을 쓰고자 했다. 2013년 여름, 그는 예정된 전시들을 취소하고, 스튜디오 어시스턴트들을 내보내고, 온라인에 기재된 자신의 사진, 기사, 프로필 삭제를 요청하려고 잡지사들에 연락했다. 그리고 소설 쓰기에 착수했다. (...) 1년이 지났다. 그는 250쪽 분량의 소설을 썼지만, 만족스럽지 않았다. 그렇게 글쓰기를 뒤로하고 다시 본업인 미술 작업으로 되돌아가려 했을 때, 바로 그때, 그는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고, 불과 몇 개월 만에 자전 소설 『세스 프라이스 개새끼』를 완성했다.”

이 책의 탄생 배경은 역자가 후기에 밝힌 것처럼 자명하지만, 작중 화자의 말에 따르면 ‘소설’보다는 ‘시’에 가까울 이 작품의 위치는 뚜렷하지 않다. 여러 인터뷰와 자료, 그간 세스 프라이스가 선보인 작업과 출간한 책들을 감안하면 아마 이 작품은 문학보다는 미술적 실천에 가까울런지 모른다고, 추측될 뿐이다.(패션 디자이너 팀 해밀턴과 협업한 S/S 2012 컬렉션은 도큐멘타에서 선보인 바 있으며, 이 책 역시 휘트니 미술관에서 낭독되었다.) 이 모호한 중간 지대, 미술로서 문학과 문학으로서 미술 사이 어딘가야말로 “정답은 없고 모순적 가치들로 가득한 현대 미술의 역설적 성향에 매력과 환멸을 동시에 느끼며 갈등”하는 그녀가 존재하기에, 혹은 끊임없는 가변성과 반복적인 역설로 텍스트의 권위를 부정하는(글을 써 놓고 스스로 개새끼라고 하면 도무지 할 말이 없다) 세스 프라이스와 만나기에 적당한 공간일 것이다.


추천사

미술계에 대한 단연 최고의 묘사
— 킴 고든

현대 미술과 문학에 대한 깊숙한 선언
— 『빌리버』


발췌

그녀는 자리에 앉아 부카티니 콘 레 폴페테를 허겁지겁 먹으면서, 어느새 의식의 흐름을 따라 추상화 역시 미트볼 스파게티와 같이 회생 가능할지 상상해 봤다. 생각해 보면 추상화와 이탈리아-아메리카 음식은 비슷한 역사를 지녔다. 둘 다 20세기 초반에 등장해 처음엔 푸대접을 받았고(마늘 냄새!) 둘 다 20세기 중반 들어 힙한 얼리어답터들 사이에서 유행을 탔지만 결국 사그라들었고, 이를 토대로 대중적 인기를 누렸으며, 이런 현상에 따분함과 싫증을 느낀 엘리트들의 눈 밖에 나게 됐다.(10쪽)

이 모든 변화에도 불구하고 미술의 현 상황은 어땠나? 입막음 값으로 받은 돈에 빠져, 진화론적 문제인 좋고 나쁨, 추상과 구상, 대중성과 진보성의 대립을 드디어 해결했다고 자화자찬 중이었고, 결과적으로 낙찰가 외에는 잃을 것도 없었다. ‘상업 미술’을 거부하는 정치적인 작업 또한 대개 비트코인, 은행 로고, 신용 부도 스와프, 그리고 모호한 상위 1퍼센트를 향해 비평의 칼날을 겨누며 금융에 집착했다. 이러한 시장과의 강박적 관계는 결국 무력감으로 귀결됐다.(20쪽)

미술계의 글쓰기를 비평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거의 없었고, 그럴 만한 이유도 충분했다. 태만하다거나 난해하다고 사람들이 혹평하면 ‘예술적’으로 글을 쓰려고 했다고, 논리적 수사가 아닌 탈속적 시상을 추구했다고 받아치면 됐다. 이런 글을 쓰는 작업은 꿈속 장면밖에 없는 영화를 만드는 일과 같아서, 비논리적이고 아무렇게나 만들었다는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웠다. 여기서도 물론 아무것도 잃을 게 없었다.(21쪽)

점점 잠식해 오는 문제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건방진 놈처럼 보이기는 싫으니까 이런 걱정들을 입 밖으로 꺼내지는 못하지만, 속은 타들어 간다. 들러리가 되는 일은 가슴 아프기는 해도, 사람들이 더는 호들갑을 떨어주지 않기 때문은 아니다. 더 걱정스러운 점은 모든 문들이 열린 뒤에는 닫히는 일만 남았다는 사실이다. 컬렉터들과 큐레이터들의 관심이 시들시들해지고, 작품의 질이 떨어지거나, 단순히 소재가 고갈된다. 하지만 이마저도 가장 큰 시련은 아니다. 제일 큰 문제는 문들이 열리고, 기계 장치의 일부분이 된 후 이게 다란 걸, 이 이상은 아무것도 없음을 자각하는 일이다.(26~27쪽)

어떤 사람들은 미술계가 학계의 지적 무게, 패션계의 화려함, 월가의 도박성을 모두 갖췄음에도, 겉보기에는 누구나 입장 가능한 무료 공연과 같은 파티임을 알았다.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이 파티로 몰려들었고, 모두를 위한 자리는 있었는데, 미술계는 자격증을 요구하지 않았고, 규제는 없다시피 했으며, 미술은 고정 관념의 파괴라는 미신이 이론, 패션, 경제적으로 별의별 말도 안 되는 것도 다 통용되는 분위기를 조성했기 때문이다.(32쪽)

한 시대의 기술은 당대 조각의 본질을 좌우했다. 청동기 시대, 철기 시대, 정보화 시대와 같은 용어들이 탄생한 이유는 사용 가능한 새로운 물질들에 의해 한 시대가 정의되고, 미술가들과 장인들은 새로운 작업 방식들을 최대한으로 이용하다가 구식이 되면 버렸기 때문이다. 오늘날 동으로 작업하는 조각가가 몇이나 될까? 이러한 작가들은 이 고대의 매체를 의도적으로 고대를 지칭하기 위해 사용했는데, 그게 의도가 아니라면, 안 됐지만, 관객들은 어쨌든 그렇게 인식할 터였다.(61쪽)

작품은 단순하고 즉시 이해돼야만 했다. 작품을 통해 미묘함, 은밀한 신비, 무상(無常), 또는 신비로운 느림 속에서 피어나는 우아함을 다루는 미술 작가들은 미술계 밖의 사람들에게 알려질 생각은 버려야 했다. 대중적으로 의미 있는 미술 작품을 만들 때는 권총의 특성을 본보기 삼으면 도움이 됐다—간단하고, 친숙하고, 장전된.(62쪽)

두바이 개발자들의 선견지명은 대단했다. 그들은 대중이야말로 커푸어의 신비한 「구름 문」을 ‘콩알’(The Bean)로 변신시키고, 렘 콜하스의 중국중앙텔레비전 사옥을 ‘큰 바지’(Big Pants)로 만들어 버리는 오묘한 힘의 소유자임을 알았다. 어떠한 예술적 기교도 자신들보다 거대한 무언가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사람들의 습성에 대적하지 못했기 때문에, 흐름에 따라 이미 불이 난 집에 부채질하는 편이 더 현실적이었다.(71~72쪽)

쿤스는 비틀스만 한 문화적 영향력을 갖겠다는 목표를 내걸었고, 비틀스는 자신들이 예수보다 더 영향력이 크다는 주장으로 사람들을 격분시켰으며, 이는 “나는 신이다”라고 선언한 웨스트에 의해 업데이트됐다. 이러한 야망들은 물론 실현 불가능했는데, 이렇게 영향력 있고 독보적인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틀을 평생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비틀스는 하나의 대중음악 현상으로 남았고, 쿤스는 영원히 많은 사람들이 이름을 들어봤을 법한 미술 작가일 테고, 카녜이는 카녜이로 남을 테며, 하느님은 하느님이었다.(80쪽)

논의 대상이 광고든, 금융이든, 미술이든, 디지털 통신망이든 메시지는 비슷했다—가치는 오르락내리락한다. 불변성에 의존하지 말라. 무엇이든지 대체 가능하고, 변형 가능하며, 쉽게 합성되고, 옮겨지고, 버전화되고, 불법 복제된다. 가장 미천한 것이 고귀해지고, 고귀한 것이 미천해지는데, 이 흐름을 타고 놀지 못하면 쫄딱 망한다. 이를 즐겨라. 모든 것은 구제 가능하다! 기독교적인 관념처럼 들리지만, 뭔지는 몰라도 아마 그 반대일 테다.(96쪽)

불행히도, 그녀의 사고에는 근본적인 오류가 존재했다. “모든 것은 다른 무엇인가로 변모 중이다”라는 관념, 그리고 이와 연관된 예술의 변증법적 특성, 디지털의 급진적 합성 능력, 후기 자본주의의 교활한 불가피성에 대한 그녀의 공상들은 모두 외면할 수 없는 물질성, 또는 달리 말하자면 인간적 고통을 고려하지 않았다.(103쪽)


차례

세스 프라이스 개새끼
역자 후기


지은이

세스 프라이스. 1973년 동예루살렘에서 태어났다. 브라운 대학교에서 현대 문화와 미디어 학사 학위를 받았다. 휘트니, 베니스 비엔날레와 도큐멘타(13) 등 다수의 전시에 참여했으며, 현대 사회와 이미지의 관계를 다룬 작업으로 잘 알려졌다. 저서로 『확산』(Dispersion), 『시집』(Poems), 『미국에서 사라지는 법』(How to Disappear in America), 『삶을 위하여』(Dedicated to Life) 등이 있다. 현재 뉴욕을 기반으로 미술, 음악, 글쓰기를 비롯한 다양한 작업을 진행 중이다.

옮긴이

이계성. 1991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런던의 첼시 대학교에서 순수 미술 학사, 슬레이드 미술 학교에서 미디어 예술 석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울을 기반으로 미술과 글쓰기의 경계를 다루는 작업을 진행 중이다.


편집

박활성

디자인

슬기와 민

표지 속 표지 사진

Charlotte Wales / Trunk Archi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