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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춘만의 중공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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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춘만의 중공업

조춘만, 이영준 지음

현대중공업 용접사에서 국내 최고의 산업 사진가로, 한국 산업의 역사를 대변하는 조춘만의 중공업 일대기

1974년, 조춘만은 열여덟 살의 나이에 울산 현대중공업 조선소에 취업을 하게 된다. 찢어지게 가난한 농가의 아들로 태어나 초등학교를 간신히 졸업하고, 그때까지 도시 구경이라고는 대구 시내에 몇 번 가본 게 다였던 조춘만에게, 당시 2만 5000여 명이 일했던 울산의 공장은 괴물 같은 모습으로 비춰졌으리라. 하루빨리 용접을 배워 돈을 벌고 싶었던 그는 잠자는 시간마저 아껴가며 어깨너머로 용접 기술을 익혔다. 용접봉이 탈 때 나오는 자외선 때문에 사람들이 스트레스를 받는다며, 쉬는 시간에 용접 연습을 못하게 하는 조장에게 울분을 터트렸던 그는, 그러나 반년이 되지 않아 웬만한 용접사 못지않은 솜씨를 지닐 수 있게 된다.

이후 포항제철 제3고로 건설 현장 등 용접사가 필요한 곳이면 어디든 그의 발길이 이어졌다. 산업 현장에서 그때그때 일하다 보니 다음 일거리와 연결되지 않아 장기간 실직 상태에 처하기도 했다. 그럴 때는 “제정신으로 버티기가 힘들었다. 아내는 임신을 했는데 너무 심한 입덧 탓에 음식만 먹으면 토해 날마다 청량음료인 사이다만 마”시던 나날. 그런 그에게 해외 진출의 기회가 주어진다. 1970년대 중반을 넘어가며 국내 건설사들의 해외 수주가 활발해지던 시기, 중동에 나가면 꽤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끈질기게 지원한 끝에 기회를 잡은 것이다.

1980년 2월, 갓 태어난 아들의 이름도 지어주지 못하고 한이석유(지금의 쌍용정유) 사우디아라비아 공장 건설 현장에 도착한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살인적인 기후와 근무 시간(노동량으로 치면 한 달에 700시간)이었다. “지금도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는 7월의 어느 날에는 너무 더운 날씨에 진이 다 빠져 그늘에 앉아 있는데 머리에서 흐르는 땀이 턱 끝에서 1초에 두 번 이상씩 뚝뚝 떨어”지기도 했다. “오늘날과 달리 머나먼 타국에서 일한다는 것은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이 수반되는, 인내가 필요한 일이었다.” 전화 통화도 하지 못하고, 편지를 보내면 답장 받는 데 한 달이 걸리는 곳. 그곳에서 그는 괴로움을 견디지 못해 고작 어깨 높이의 침대 난간에 전깃줄로 목을 맨, 동료의 거짓말 같은 죽음을 지켜봐야 했다.

6개월을 버티기 힘든 그곳에서 2년을 일하고 돌아와 보니 “스물일곱이 된 아내가 울산에 아담한 단독주택을 마련해놓고 아들과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숨을 고른 그는 이번에는 쿠웨이트 서도하 발전소 건설 현장으로 건너가게 된다. 쿠웨이트에서는 날씨는 둘째 치고 “허리를 다쳐 고생을 했다. 비 오듯 쏟아지는 쌀알 같은 용접 불똥 하나가 귓속으로 들어가 고막을 태운 채 지금도 귓속에 박혀” 조춘만은 지금도 청력에 문제가 있다. 멈출 줄 모르고 돌진하던 한국의 산업 개발은 그렇게 그에게 상흔을 남겼다.

조춘만의 사진을 통해 제 모습을 찾은 한국 산업 경관 표상의 역사

1956년에 태어나 농사일로 잔뼈가 굵은 조춘만이 고향을 버리고 울산으로 향한 해가 1974년이라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이는 바로 모래사장밖에 없던 울산 미포만에 현대중공업이 조선소를 짓고(1970년) 본격적으로 대형 선박을 짓기 시작한 해이기 때문이다. 1974년 ‘애틀란틱 배런’이라고 명명된, 현대중공업이 만든 길이 355미터, 폭 51미터, 26만 6000톤 급의 괴물 같은 배는 울산을 본격적인 공업 도시로 인식시키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당시의 공장들은 규모가 크지 않았을 뿐 아니라 울산 군민들은 공업이 뭔지, 산업이 뭔지 제대로 인식할 수 없었다. 당시 울산의 어느 초등학교 교가 가사 일부가 ‘강산도 아름다운 우리 고장은 공장 연기 치솟는 공업의 도시’였다고 하니 아직은 산업을 괴물로 인식”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조춘만도 말한다. “(울산의 부곡동은) 1978년도에 나 역시 용접공으로 생활하면서 미래에 좀 더 나은 환경에서 살 수 있을 거라는 꿈을 키워나간 곳이기도 하다. 당시에는 공해가 심하다, 그런 말도 없었고 그저 공단이 가까워서 일하러 가기 좋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이후, 누구도 손댈 수 없는 괴물로 성장한 한국 산업 개발의 역사를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조춘만이 농사를 버리고 공업을 택한 것은 한국이 농업 국가에서 공업국가로 탈바꿈한 과정의 축소판”이나 다름없다. 당시 많은 사람들의 삶이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조춘만은 하나 다른 점이 있다. 불혹을 넘겨 사진에 눈뜬 후, 자신이 경험한 산업이라는 괴물에 카메라를 들이댄 것이다.

기계비평가 이영준은 조춘만의 사진을 두고 하나의 “조용한 혁명”이라고 말한다. 그로 인해 국가라는 프로파간다, 자본이라는 프로파간다가 끼어들지 않은, 최초의 제대로 된 산업 경관의 표상을 비로소 우리도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혁명의 의미를 밝히기 위해 이영준은 1778년 건축가 클로드 니콜라 르두가 프랑스 아르케스낭에 세운 왕립 제염소를 시작으로 서구 공장 건축의 역사를 살피고, 18세기 디드로의 『백과전서(Encyclopédie)』로 거슬러 올라가는 서구 산업 경관 표상의 역사를 짚어낸다. 20세기 초 찰스 쉬러가 찍은 포드 공장 사진부터 마거릿 버크화이트, 폴 스트랜드, 베허 부부, 윈스턴 링크의 사진에 이르기까지, 풍부한 산업 표상을 지닌 그들에 비해 한국의 산업 경관은 초라하기만 하다. 이유는 단순하다. “1970년대에 중고등학교를 다닌 우리들은 수학여행을 현대중공업 조선소와 포항제철로 가게 된다. 하지만 거기서 우리가 본 것은 산업 시설의 숭고미가 아니라 앞사람 뒤통수뿐이었다. 우리들은 그런 공장의 시설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관심이 없었고, 우리들을 인솔한 선생님들도 관심이 없었기는 마찬가지였다. 1970년대에는 누구에게도 산업 경관이 아름다운 표상으로 다가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1980년대 이후가 되면서 산업 경관의 표상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다. 기업 연감이라는 것이 발행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기업 연감에는 산업 시설의 사진이 실리지만 이것도 제대로 된 산업의 표상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사진의 구도는 항상 공장의 전경을 배경으로 작업복을 입고 헬멧을 쓰고 손에는 설계도를 든 직원이 손으로 멀리 하늘을 가리키는 상투적인 것들뿐이었다. 그 사진들은 엄밀히 말해 산업에 대한 표상이 아니라 자본의 프로파간다였다.” “(그 사진가들은) 원래 자기 작업 하다가 돈벌이로, 혹은 약간의 경험을 위해 기업 연감 사진을 찍을 뿐이지 정유 공장의 파이프라인이 너무 아름다워서, 조선소의 크레인이 너무 웅장해서 못 찍게 하는 것을 뚫고 찍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금지된 경관, 강철의 괴물을 좇는 조춘만의 사진이 우리에게 중요한 이유

조춘만의 사진 찍기는 남의 눈을 피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그곳에서 일하는 노동자를 제외한 일반인에게 산업은 그 속살을 내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삼각대의 은빛도 검정 테이프로 감고, 옷도 자연과 비슷한 색의 옷을 입”은 채 조춘만은 누구의 주문이 아닌 자신의 욕망을 좇아 산업 경관을 찾아 헤맨다. “검은 보자기를 쓰고 오랫동안 카메라를 조작하다 보니 더러 수상한 사람이나 개 도둑으로 몰려 경찰 조사를 받기도 했다.”

그렇게 금지된 경관을 찍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조춘만을 두고 이영준은 이렇게 말한다. “그의 사진은 누구의 것도 아니었던 중공업의 경관을 애호를 통해 선택하고 우리에게 되돌려준다. 그것은 아주 작은 일이지만 매우 의미 있는 역사적 전환이다. 우리 곁에 있었지만 우리의 시선 안에 들어오지 않았던 중공업의 경관을 이제야 볼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거와 다른 관점에서 산업 경관을 보는 것이 우리에게 왜 중요할까? 바로 ‘소비’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는 우리를 세계와 연결해주는 고리가 되기 때문이다. “이 세상이란 복잡하게 얽힌 물질의 얼개로 돼 있다. 그 위에 담론과 표상들이 얹혀 있어서 우리는 그것을 통해 물질을 접하고 이해한다. 의미 있고 제대로 된 삶이란 그 얼개들과 풍부하게 관계 맺는 삶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우리는 “생산으로부터 소외돼 있다. 우리들이 쓰는 소비품이 어디서 어떻게 생산되는지 알지도 못하고 볼 수도 없다. 게다가 생산에 참여한다는 것도 원초적으로 불가능하다. 참여는커녕 피드백도 불가능하다.” “자신이 쓰는 제품이 어떻게 생산되는지 관심이 없고 오로지 디자인과, 몸에 좋은가 안 좋은가에만 관심이 있다. 그러니 소비자인 우리들의 삶이란 겉으로는 풍부한 것 같지만 넓디넓은 물질세계와 통교한다는 점에서는 한없이 빈곤한 것이다.” 조춘만의 사진을 보는 이영준의 시선은, 스스로 개척해가고 있는 그의 기계 비평 작업, 즉 이렇게나 많은 기계에 둘러싸여 살아가면서도 정작 그것과 실질적인 관계를 맺지 못하는 현대인을 위한 기계 비평적 시선의 연장선상에서 바라봐야 할 것이다.

나아가 이영준은 조춘만의 사진을 통해 “이제는 ‘인간적’ 앞에 다른 말이 붙을 때”라고 주장한다. 조춘만과 이영준에게 삭막한 산업 경관은 ‘비’인간적인 것이 아니라 ‘탈’인간적인 것이다. 어쩌면 지금은 그의 말대로 “이 세상을 인간이 만들어냈고 인간이 책임져야 하며 궁극적으로 인간이 잘사는 세상이 돼야 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서, 인간과 사물이 어떤 관계를 맺고 살아가야 하는지를 고민해야” 할 때인지도 모른다. 그래야 비로소 조춘만 덕분에 가지게 된 산업 경관, “그것도 매우 정교하고 감각적으로 풍부한 최상급의 기록”으로서 한국의 산업 경관이 더욱 풍부한 의미를 띨 수 있을 것이다.


발췌

조춘만의 작업을 제대로 보려면 많은 것이 설명돼야 한다. 도대체 왜 그는 공장 등 산업 시설을 찍기 위해 고군분투하는지, 왜 강철과 콘크리트로 된 산업 경관을 아름답다고 보는지, 사진을 어떻게 다루어 그 아름다움을 포착하는지, 혹은 꾸며내는지 알려면 우리는 사진의 역사 전체와 산업의 역사, 한국에서 산업이 표상해온 역사 등 여러 겹의 역사를 알아야 한다. 조춘만이라는 개인은 그만큼 많은 것을 응축하고 있다. 사실 그는 그런 모든 역사를 생각하면서 작업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찍고 싶은 산업 경관을 좇아서 충동적으로 작업한다. 하지만 그 충동은 역사적인 것이다.

(산업이라는) 괴물을 어떻게 해야 할까? 쳐부수든지 어떤 식으로든 다뤄야 한다. 창 하나 들고 풍차가 괴물이라며 달려든 돈키호테처럼, 사진가 조춘만은 카메라 하나 들고 괴물에 맞선다. 아니, 살살 접근하기 시작한다. 괴물의 정체는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미지의 정체성이 괴물의 정체성이다. 그런데 인간은 미지의 정체성을 계속 상대하고 있을 수 없다. 그래서 괴물에 표상을 부여해야 한다. 하다못해 ‘괴물’이라는 딱지라도 붙여야 한다. 그러면 위험하다느니, 이질적이라느니, 없애버려야 한다느니 하는 처방들이 나오고, 이어서 다뤄나갈 수 있는 어떤 것으로 바뀌기 때문이다. 조춘만은 괴물 같은 울산의 경관을 사진으로 찍어서 다룰 수 있는 어떤 것으로 바꾼다. 즉 하나의 표상으로 만들어버린다.

결국 한국에는 필요에 의해서 찍은 공장 사진은 있었지만 그것을 멋지고 의미 있는 경관으로 찍은 사진은 없었다. 한국 사람들은 근대화를 위해 산업이라는 괴물을 끼고 살아야 했지만 그것을 표상으로 만들어서 다스리는 법을 배우기까지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공장이 포토제닉한 것으로 비치려면 21세기까지 기다려야 했던 것이다. 1917년 알버트 칸이 설계한 포드 자동차 공장을 1927년 찰스 쉴러가 사진 찍는 식의 표상의 계보는 한국에 없는 것이다.

우리는 소비하면서 생산으로부터 소외돼 있다. 우리들이 쓰는 소비품이 어디서 어떻게 생산되는지 알지도 못하고 볼 수도 없다. 게다가 생산에 참여한다는 것도 원초적으로 불가능하다. 참여는커녕 피드백도 불가능하다. ‘요즘 쓰는 전동 칫솔의 손잡이 원료인 폴리머의 탄소분자 배열에 좀 문제가 있는데 해결해주세요’라는 식의 피드백은 소비자로서는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결국 소비자란 구조들을 닫힌 것으로만 체험할 뿐 그것을 열어서 속을 들여다보거나 구조를 바꿀 관심도 능력도 자격도 부여돼 있지 않은 불쌍한 사람이다. 그래서 소비자는 사물의 객체로만 남는다. 자신의 의지대로 다룰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기계비평적 관심이란 사물의 닫힌 구조 속으로 파고 들어감으로써 소비자의 처지를 극복하고 사물의 주체가 되고 싶어 하는 욕구이다.

시급 70원, 하루 12시간 맞교대, 7시 반 출근 7시 반 퇴근, 잔업은 10시까지였다. 토요일에 철야를 시키면 단 한 번도 빼먹지 않고 일을 했고, 심지어 토요일 아침에 들어가서 일요일 밤에 퇴근하는 36시간 동안 단 한 시간도 자지 않고 일하기도 했다. 설과 추석 명절에도 계속 일을 했다. 한 달에 보통 400시간이 넘었다. 열심히 일한 덕분에 70원이던 시급이 5원씩 매달 올라 165원까지 스트레이트로 올라갔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늘 말 못 할 고민이 있었다.

일을 마치고 밥을 먹으러 숙소에 들어왔는데 사람이 죽었다는 소리가 들렸다. 황급히 달려가 보니 간호사와 몇몇 사람들이 겁에 질린 표정으로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그분이 생을 마감한 장소는 2인 1실의 작은 컨테이너 숙소였는데 2층으로 된 침대 난간에 전깃줄로 목을 매달아 생을 마감한 것이다. 난간대 높이가 사람 어깨 높이도 안 되는 곳이었다. 그런데도 스스로 생을 달리하고자 하면 죽는 것이 가능했던가 보다.

아무런 느낌도 감정도 없는 철 조각으로 감성적 생명체를 지닌 철 구조물을 창조하는 광경을 지켜보는 것보다 더 흥분되는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현장에서 일할 당시에는 조형적 측면이나 미적 감각을 전혀 느끼지 못했던 광경이 강산이 두 번 넘게 변한 후에야 예전과 전혀 다른 시각으로 나의 눈에 들어왔고, 또 그것을 가슴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용접사(鎔接士)는 전문적 기예를 닦은 사람이라는 뜻의 선비 ‘사(士)’를 쓴다. 그래서 용접 자체가 늘 예술이라는 생각이 일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통용됐고 나 역시 그런 생각으로 일했다. 아마도 그 사실이 현재의 내가 산업 구조물에 깊은 애착을 가지게 된 계기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농사꾼의 아들로 태어나 철을 다루고, 산업 사진을 찍고, 철을 대상으로 한 행위 예술에 철로 만든 배를 탐구하는 여행까지… 나는 지금까지 경험한 모든 산업 시설과 인공적 시설물이 정직하다는 조심스런 결론을 얻었다.


차례

조선소, 항만, 선박

조춘만의 산업 사진이 미래에 필요하게 될 이유 / 이영준

석유화학, 공장

조춘만의 58년 / 조춘만


지은이

조춘만은 1956년 경상북도 달성군에서 태어나 농사일로 잔뼈가 굵었다. 1974년 열여덟의 나이에 울산 현대중공업에 들어가 산업과 연을 맺은 후 1970~80년대 조선소, 발전소, 석유화학 공장 등 국내외 산업 현장에서 용접사로 일했다. 불혹을 넘겨 사진에 눈을 뜬 그는 경일대학교 사진영상학과를 졸업하고 지금껏 산업 현장을 좇으며 강철의 풍경을 카메라에 담아왔다. 개인전으로 ‘Townscape’(2002), ‘Industry Korea’(2013)를 열었으며 2013년 프랑스 오시모시스 극단의 초청으로 「철의 대성당」 퍼포먼스에 참여하기도 했다. 현재 울산대학교 평생교육원에서 사진을 가르치고 있다.

이영준은 기계비평가다. 인간보다 기계를 더 사랑하는 그는 정교하고 육중한 기계들을 보러 다니는 것이 인생의 낙이자 업이다. 일상생활 주변에 있는 재봉틀에서부터 첨단 제트엔진에 이르기까지, 독특한 구조와 재료로 돼 있으면서 뭔가 작동하는 물건에는 다 관심이 많다. 원래 사진비평가였던 그는 기계에 대한 자신의 호기심을 스스로 설명해보고자 기계비평을 업으로 삼게 됐다. 그 결과물로 『기계비평: 한 인문학자의 기계문명 산책』(2006), 『페가서스 10000마일』(2012) 같은 저서를 썼다. 또한 사진비평에 대한 책(『비평의 눈초리: 사진에 대한 20가지 생각』, 2008)과 이미지 비평에 대한 책(『이미지 비평의 광명세상』, 2012)도 썼다. 현재 계원예술대학교 융합예술과에서 예술비평과 기계비평을 융합하려 애쓰고 있다.


표지 사진

이영준

편집

박활성

디자인

김형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