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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타이포그래피: 비판적 역사 에세이

현대 타이포그래피: 비판적 역사 에세이
Modern Typography: An Essay in Critical History

로빈 킨로스 / 최성민 옮김

1992년 출간 이래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프랑스어 등으로 번역되며 타이포그래피사의 역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로빈 킨로스의 『현대 타이포그래피: 비판적 역사 에세이』가 출간되었다. 국내에서는 지난 2009년 영어 2판을 저본으로 삼아 번역된 바 있다. 이번 판에서는 그간의 시대 흐름을 고려해 몇몇 주요 번역어를 바꾸었으며, 2019년 파리 에디시옹 B42에서 나온 판본의 변화를 반영해 몇몇 도판을 교체했다. 출간된 지 30여 년이 가깝지만, 이 책은 현재 러시아어와 체코어, 중국어, 일본어판 출간 작업으로 이어지며 외연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 힘은 단순히 충실한 역사서를 넘어서는, 저자의 다음 말에서 나온다. “허튼 수다와 혼란 가운데에서도 계몽은 이어진다. 구호는 같다. 의심, 비판, 이성, 희망.”

의심―현대 타이포그래피?

타이포그래피라는 말에는 언제나 현대적 속성, 즉 대량 생산, 표준화, 전문화, 분업화 등의 개념이 내재되어 있으므로, 현대 타이포그래피란 말은 동어 반복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으로 이 책은 시작한다. 모든 역사 서술은 “신화적이거나 허구적인 속성을 띨 수 있고, 따라서 선별된 사례들이 마치 일정한 서술법에 따라 역사 발전 단계를 구성하는 것처럼 보일지” 모른다는 의심도 잊지 않는다. 그러나 역사서를 집필하기로 마음먹은 이상, 현대 타이포그래피가 언제 시작하는지는 밝혀야 하는바, 저자는 이전까지 인쇄 및 타이포그래피 역사를 다룬 책들과 달리 “1450년이나 1800년, 1900년 또는 1914년이 아니라 1700년 무렵”을 현대 타이포그래피의 시작으로 삼는다. ‘현대성’의 성립을 단순히 기술의 발명이나 사건이 아닌, 하나의 태도나 의식 표명으로 판단한다면 그때서야 인쇄술이 타이포그래피로 변한다는 뜻에서다.

비판―타이포그래피 역사

타이포그래피 실천을 이론화하고 여기에 질서를 부여하려는 노력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1700년대부터 탁상출판이 본격화한 1990년대까지 주요 지역과 운동, 실천가를 두루 살피는 저자가 가장 먼저 비판 대상으로 삼는 것은 기존 타이포그래피사 모델이다. 거칠게 말하자면 가시적 인쇄물과 디자인(디자이너)에 초점을 맞추고, 활자체 양식에 필요 이상으로 지면을 할애함으로써, 주로 미학적 측면에 따라 서술이 이뤄지는 모델을 말한다. 이 책은 타이포그래피를 보다 넓은 사회적 맥락과 연결함으로써 이러한 관성을 깨려고 노력함과 동시에, 그 한계― 타이포그래피 수용자, 즉 독자에 대한 연구의 부재―또한 명확히 하고, 현실적 조건 내에서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고자 한다. 주요 비판 대상은 타이포그래피 역사 곳곳에 존재하는 단순화한 이분법이다. 소위 전통 타이포그래를 중심에 두고 현대주의 타이포그래피를 고립된 존재로 다루는 시각에서 벗어나, 전통 타이포그래피에 내재한 현대주의를 드려내고, 현대주의 타이포그래피에도 엄연히 전통이 스며 있음을 밝힌다.

이성―결과물 이면의 사고

현대 타이포그래피의 시작을 1700년대로 설정한 데서부터 어느 정도 드러나는바, 이 책을 관통하는 또 하나의 기조는 바로 이성에 대한 믿음이다. 현대 타이포그래피를 추동한 것은 근본적으로 이성이며, 앞으로도 그러하리라는 믿음이기도 하다. “이성이라는 도구가 인간의 비이성적 총체에 입힌 상처는 더 철저한 이성으로만—모자란 이성이 아니라—치유할 수 있다”는, 서두에 실린 아도르노의 말처럼, 그에게 진정 현대적인 타이포그래피란 시대를 떠나 흔들리는 가치 체제와 급변하는 사회 맥락 속에서도, 권위에 도전하고, 독자를 존중하며, 이성에 기반해 실천하는 타이포그래피다. 이러한 타이포그래피를 판별하는 기준 역시 심미적 측면이 아닌, 그 이면에 있는 사고임을 명확히 하는 저자는, 예컨대 흔히 19세기에 공업화가 확산되고, 그에 따라 인쇄(타이포그래피) 품질이 저하되었으며, 그 반발로 현대 타이포그래피가 등장했다는 일반적인 도식을 의심하고, 유럽에 주로 치중된 현대 타이포그래피 역사 서술에 비판적으로 접근하며, 마땅히 받아들이는 역사가 아닌 사실과 기록에 근거해, 그 이면에 숨은 현대적 사고를 탐색한다.

희망―지속적인 기획으로서 현대주의

이 책의 집필 시기가 1980년대 중후반이라는 점, 즉 서구에서 포스터모더니즘 담론이 만개하던 때 집필되었다는 사실은 이 책의 좌표를 가늠하는 데 도움을 준다. 말하자면 이 책은 “특정한 시대적, 문화적 상황에서 쓰였다. ‘현대’가 죽었다는, 그리고 ‘탈현대’에 추월당했다는—또는 확장되고 수정되어 탈현대가 됐다는—주장이 흔히 나오는 상황을 말한다.” 저자는 “현대성이 ‘지속 중인 기획’이라는 (위르겐 하버마스의) 가설을 깊이 새겼고, 이를 타이포그래피에 적용해 보려”는 뜻에서 이 책을 썼음을 밝힌다. 역자가 흔히 ‘근대/모던’이나 ‘근대주의/모더니즘’으로 번역되는 ‘modern/modernism’을 ‘현대/현대주의’로 번역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지나친 거리감이 느껴지는 ‘근대’나 특수하고 고유한 현상으로 바라보게 되는 ‘모던’이라는 용어 대신 있는 현재로서 ‘현대’가 “현대성의 현재성을 주장하는” 이 책에 맞는 옷이라는 뜻이다. 2004년, 마지막 장 「현대주의 이후 현대성」을 대폭 수정하며 저자는 이렇게 말했다. “1980년대와 1990년대 초에 일어난 격랑을 더 잘 돌아볼 수 있는 지금, 이 책에는 조금 더 쓸 만한 결론을 실었기 바란다.” 현대 타이포그래피를 향한 저자의 희망이 그로부터 15년이 흐르는 동안, 혹은 지금 여기 한국에서 어떻게 이어지고 있는지 살피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


발췌

현대성의 역사를 둘러싼 논쟁은 결론에 다다르지 못할 듯하다. 현대성 개념 자체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역사적 시점도 달라지기 마련인데, 대개 ‘현대’의 기점은 인쇄술 초창기보다 후대로 잡히곤 한다. 증기 기관 발명과 산업화, 또는 더 후대로 1차 세계 대전 등이 흔히 꼽히는 계기다. 이 책은 1450년이나 1800년, 1900년 또는 1914년이 아니라 1700년 무렵을 기점으로 잡는데, 이 또한 내가 내세우는 논지다. 인쇄술이 현대성을 내포하기는 했지만, 구텐베르크가 이를 완전히 또는 즉시 실현해 주지는 않았다. 인쇄술은 현대성을 가능하게 했지만, 타이포그래피에서 현대적이라 인정할 만한 태도는 인쇄술이 발명되고 250여 년이 지난 다음에야 비로소 등장했다. (「현대 타이포그래피」, 12~13쪽)

증기 기관, 이어 전동 장치가 인쇄 공정에 도입되면서 인쇄물 품질이 떨어졌다는 시각이 표명 또는 암시되곤 했다. 바로 이런 현실에 반발해 19세기 말 ‘인쇄 부흥’ 운동이 일어났다는 시각이다. 그러나 이전 시기의 평균적 인쇄물을 검토해 보면, 그런 ‘몰락’이 허구에 불과함을 눈치챌 것이다. 인쇄 품질은 동력 인쇄기 도입으로 도리어 높아졌다. (...) 즉, 기술 혁신 자체가 품질을 저하했다기보다는, 오히려 업자의 이윤을 유지 또는 증대하려는 목적으로 광범히 벌어지던 품질 저하와 희생에 기계가 동원됐다는 편이 정확하다. (「복잡한 19세기」, 35~36쪽)

켐스콧 프레스 출간물의 힘은 상당 부분 시대착오적 성격에서 나왔다. 더 정확히 말하면, 단순한 복고나 재현이 아니라 시대에서 동떨어진 책이었다는 뜻이다. 켐스콧 전용 활자는 분명히 과거 모델을 지향했지만, 동시에 새로운 특성을 창출하기도 했다. 마찬가지로, 켐스콧 책에는 꿈 같은 면이 있었다. 상상 속 과거에 기초한 타이포그래피였지만, 풍부한 물성을 통해 적극적 발언으로서 현재에 강렬히 자리 잡은 타이포그래피이기도 했다. 이처럼 켐스콧 책은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바라보는 모리스식 이상주의에 잘 어울렸다. (「반발과 저항」, 45쪽)

독일 인쇄 업계 대부분은, 전통주의건 현대주의건, 타이포그래퍼가 제시한 기준에 냉담했다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국가 사회주의가 획일적이거나 일관성 있는 태도를 유지했다는 말에도 오해를 낳을 소지가 있다. 나치 정권 초기에는 당내에서 현대주의와 전통주의 사이에 논쟁이 분명히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33년에 현대주의 중심지에서 일어난 변화는 인류 역사에서 일어난 어떤 변화보다도 급격했다. 이 순간부터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이어지는 시기에는 현대 디자인이 생존하는 데 꼭 필요한 희망을 더는 유지할 수가 없었다. (「신타이포그래피」, 122~23쪽)

게르스트너가 끼친 영향에 따라, 그리고 바젤 일반 산업 학교 교수 볼프강 바인가르트 주도로, 1970년대에 부상한 여러 디자이너는 스위스 타이포그래피의 몇몇 핵심 원칙을 깨기 시작했다. 덕분에, 다른 일반적 디자인 접근법과 마찬가지로, 스위스 타이포그래피 역시 경제 부흥기 서구라는 특정 시기와 장소에 적합했을 뿐이라는 사실이 명확해졌다. 일개 양식이었건 아니면 객관적이고 몰개성적인 방법 실험이었건 간에, 스위스 타이포그래피는 현대화에 성공한 세계가 기술적 진보에 관해 품은 확신을 표상했다. (「스위스 타이포그래피」, 163쪽)

위기가 지속되면서, 저항과 공격도 이어졌다. 1976년 무렵 음악에서 폭발한 펑크와 관련 그래픽은, 누구나 디자인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밝히는 데 혁혁히 이바지했다. 1977년, 네덜란드의 저술가 겸 편집자 겸 디자이너 피트 스뢰더르스는 펑크 구호를 연상시키는 그래픽 디자인 방법을 주창했다. “1. 종이를 준비한다. 2. 레이아웃을 시작한다.” 이런 작업은 특히 영국에서 많이 이루어졌다. 펑크 문화 디자이너 가운데 한 명을 꼽는다면 아마 네빌 브로디를 들어야 할 텐데, 그의 작업은 당시 넓은 타이포그래피 분야를 다시 주도하던 활자체 디자인을 살펴보기에 좋은—바인가르트보다 명쾌한—단서다. (「현대주의 이후 현대성」, 166쪽)

디지털 기술이 끼친 직접적, 가시적 영향으로는 문자의 정체가 한층 불분명해진 점도 꼽을 만하다. 금속 활자에서 물체로 정형화되고 안정됐던 형태는 사진 식자를 거치며 이미 불안정해진 상태였다. 디지털화 과정에서 문자는, 디지털 기술의 본성 탓에, 파편화했다. 금속 활자 시절 확립된 활자체 분류법(로먼, 이탤릭, 볼드) 이나 간격 규칙 등은 이제 어떤 물질적 필연성도 없는 만큼, 변형하거나 무시하는 일이 흔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이상적 타이포그래피 품질은 수호해야 하는 가치가 되고 말았다. (「현대주의 이후 현대성」, 171쪽)

1990년대에는 주요 관련 기업이—타이포그래퍼에게는 어도비, 애플, 마이크로소프트가 특히 눈에 띄었다—연이어 제품을 수정, 보완하는 경주가 벌어졌다. 타이포그래피 역사가 언제나 그랬듯, 여기에서도 ‘순수한’ 디자인이란 있을 수 없었다. 오히려, 디자인은 기술과 시장에 불가분하게 얽혀 들어갔다. 타이프 1보다 우수한데도, 트루타이프는 결코 제자리를 찾지 못했다. 어쩌면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와 연계한 일이 덫이 되어 디자인계에 파고들지 못한 탓인지도 모른다. (「현대주의 이후 현대성」, 178쪽)

이 장에서 주로 다루는 시기에는—1973년부터 현재까지는—현대성에 관한 논쟁이 쉴 새 없이, 너무나 요란하고 모순적으로 벌어진 터라 차라리 한 걸음 물러나 현대성이라는 말 자체를 쓰지 않는 편이 낫겠다는 유혹마저 일 정도다. 구호나 용어를 놓고 싸움을 벌이느니, 실제로 일어난 일을 간단히 기술하는 편이 진실에 다가서는 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대성을 다루는 이 책을 마무리하려면, 그간 나온 말을 최소한 스케치할 필요는 있을 듯하다. 아무튼 그런 말도 실제로 일어난 일에 속하므로. (「현대주의 이후 현대성」, 188쪽)


추천사

간략한 타이포그래피 역사로서 이보다 좋은 책은 상상하기 어렵다. 전문 타이포그래퍼나 학생은 물론, 개인 컴퓨터와 탁상출판을 통해 새로이 타이포그래피를 접한 일반인에게도, 이 책은 현대 타이포그래피가 제 모습을 갖춘 과정을 가장 잘 설명해 줄 것이다.
―매슈 카터, 활자 디자이너, 예일 대학교

향후 연구에 귀감이 되는 섬세하고 사려깊은 타이포그래피 이론.
―마이클 록, 그래픽 디자이너, 컬럼비아 대학교

읽고 또 읽어야 마땅한 책. 도발적이고 조밀하며 주장이 뚜렷하고 철저히 독창적이다. … 고전이 될 자격이 있다.
―타니아 해러드, 디자인 역사가


차례

서문 겸 인사말

1 현대 타이포그래피
2 계몽의 기원
3 복잡한 19세기
4 반발과 저항
5 신세계의 전통 가치
6 신전통주의
7 인쇄 문화—독일
8 인쇄 문화—벨기에와 네덜란드
9 신타이포그래피
10 망명하는 현대
11 전후 재건
12 스위스 타이포그래피
13 현대주의 이후 현대성
14 사례
도판 제작 후기
15 출원—해설
16 출원—참고 문헌

역자 후기
색인


저자 및 역자 소개

로빈 킨로스
영국 레딩 대학교 타이포그래피 그래픽 커뮤니케이션 학부(1975)와 대학원(1979)을 졸업하고 저술가, 편집자 겸 타이포그래퍼로 활동해 왔다. 1980년 노먼 포터의 『디자이너란 무엇인가』 개정판을 공동 편집하고 출간하면서 하이픈 프레스를 설립했다. 1980년대에 전성기 『블루프린트』 기자로 일했고, 『아이』, 『인포메이션 디자인 저널』 등 디자인 전문지에 기고했다. 1992년 주저 『현대 타이포그래피』를 써낸 후 출판 활동에 전념, 현재까지 30여 권의 타이포그래피 관련서와 음악, 문학, 철학, 건축 도서를 펴냈다. 2002년에는 그간 써낸 주요 그래픽 디자인, 타이포그래피 관련 기사와 논문을 엮어 『왼끝 맞춘 글』 을 펴내기도 했다.

최성민
서울대학교 산업디자인학과와 미국 예일 대학교 미술 대학원에서 그래픽 디자인을 공부했다. 최슬기와 함께 디자인 듀오 ‘슬기와 민’ 으로 활동한다. 역서로 『현대 타이포그래피』, 『멀티플 시그니처』(최슬기 공역), 『디자이너란 무엇인가』, 『왼끝 맞춘 글』, 『레트로 마니아』, 『파울 레너』, 저서로 『그래픽 디자인, 2005~2015, 서울—299개 어휘』(김형진 공저), 『불공평하고 불완전한 네덜란드 디자인 여행』(최슬기 공저) 등이 있다. 서울시립대학교 산업디자인학과에서 시각 디자인과 타이포그래피를 가르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