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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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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
Suicide

에두아르 르베 지음, 한국화 옮김

프랑스 작가 에두아르 르베의 『자살』(한국화 옮김)이 워크룸 문학 총서 ‘제안들’ 31권으로 출간되었다. 사진과 글을 주요 매체로 삼아 활동한 에두아르 르베는 개념적인 작업에 몰두한 작가였다. 자신에게 영향을 준 예술가들과 이름이 같은 이들을 전화번호부에서 찾아 찍고, 유럽의 도시와 이름이 같은 미국의 도시를 촬영하고, 전형적인 인물들의 포즈나 회화, 꿈속 장면 등을 현실의 사진으로 재구성했던 그는 2002년 533개 작품 아이디어를 모은 『작품들』을 출간하면서 문학가로서의 이력을 시작했다. 이 책 『자살』은 에두아르 르베가 자살한 이듬해에 출간된 책으로, 그가 자살하기 며칠 전 송고한 글이다.

자살이라는 방식

이 책은 작가가 생전에 집필한 마지막 작품이다. 모든 작가가 자신이 마지막으로 쓸 작품을 결정할 수 있지는 않은데, 에두아르 르베는 이를 결정하는 데 성공했다. 이는 르베가 개념 미술적인 작업을 해 온 작가라는 점에서 중요해진다. 개인적인 삶을 끝내는 방식과 작가로서의 삶을 끝내는 방식을 일치시키는 선택은 작가로서 그가 추구해 온 작업 방식을 반영한다. ‘자살’은 이름이든, 포즈든, 장면이든, 자신이 현실에서 만드는 작업에서 그것들을 재구성하고 재현했던 르베의 여러 선택들의 연장선상에 있다.
이제 그의 삶은 자살에 대한 소설을 쓰고서 자살한 작가로 쓰이고 읽힌다. 지나치게 축약되었다 해도, 이것은 에두아르 르베라는 작가에 대한 사실이다.

쓰였다는 사실

“(...) 르베는 전형적인 줄거리를 가진 작품 쓰기를 거부했고, 강력한 혹은 사소한 사실만을 원했다. 그가 『자화상』 그리고 『자살』에서 보인 서술 방식은 이를 증명한다. 기억의 단편적인 조각들은 어떠한 인과관계도 시간의 흐름도 보이지 않고 그저 나열될 뿐이고, 오직 문장들의 진실만이 존재할 뿐이다.”(옮긴이의 글 118쪽)

『자살』을 쓰기 전에 발표한 『자화상』에서 자신에 대한 글을 쓴 바 있는 작가는 『자살』의 등장인물인 ‘너’에 대해 이렇게 적는다. “너는 그것이 진실인지 거짓인지에 상관없이 쓰인 것을 믿었다.”(43~4쪽) 누군가는 이 책의 등장인물인 ‘너’, 화자인 ‘나’, 그리고 작가 르베가 과연 얼마큼 겹쳐지는지 가늠하려 애쓸 수 있다. 그러나 이 세 명의 인물이 진실로 동일한지 그렇지 않은지는 실은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있다. 서사를 이룰 수 있는 구성을 배제하고 문장들을 나열하며 이루어진 이 글은 쓰여져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누군가의 죽음이 누군가의 삶에 의해 이루어졌고, 누군가의 삶이 누군가의 죽음에 의해 이루어졌고, 이 모든 과정이 누군가에 의해 글로 쓰였다는 사실을 소설이라는 매체를 둘러싼 사실로 받아들이는 태도가 이 책에 어울릴 것이다.


발췌

너의 삶은 하나의 가설이다. 늙어서 죽는 사람들은 과거의 집합체다. 그들을 생각하면, 그들이 한 것들이 나타난다. 그러나 너를 생각할 때는, 네가 될 수 있었던 것들이 따라온다. 너는 가능성의 집합체였고 그렇게 남을 것이다.(16쪽)

너는 내가 원할 때 나에게 말하는 한 권의 책이다. 너의 죽음은 너의 삶을 썼다.(17쪽)

너는 도서관에 앉아서 책을 읽기보다는 서점에서 서서 읽곤 했다. 너는 지난날보다는 오늘날의 문학을 발견하기를 원했다. 과거는 도서관에, 현재는 서점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는 현시대의 사람들보다 죽은 자들에게 더 관심이 있었다. 특히 너는 네가 ‘살아 있는 죽은 자들’이라고 이름 붙인 작가들을 읽었는데, 이들은 죽었지만 계속해서 출판되는 작가들이었다. 너는 지난날의 지식을 오늘날의 것으로 만드는 출판업자들을 신뢰했다. 너는 잊힌 작가들의 기적적인 발견을 그다지 믿지 않았다. 너는 시간이 이들 모두를 정리할 것이고, 따라서 내일이면 잊힐 오늘의 작가들보다 과거의 작가들이지만 오늘날 계속 출판되고 있는 작가들을 읽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했다.(22쪽)

오직 살아 있는 자들만 일관성이 없는 듯하다. 죽음은 그들의 삶을 구성했던 일련의 사건들을 종결시킨다. 그러면 우리는 거기에서 의미를 찾는 것을 체념한다. 의미 찾기를 거부하는 것은 하나의 삶이, 모든 삶이 부조리함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너의 삶은 완결된 것들의 일관성에 가닿지 못했다. 하지만 네 죽음이 네 삶에 일관성을 부여했다.(25~6쪽)

예술에서, 덜어 내는 것은 완벽해지는 것이다. 너는 떠남으로써 음성(陰性)적인 아름다움에 안착하였다.(27쪽)

너는 그것이 진실인지 거짓인지에 상관없이 쓰인 것을 믿었다.(43~4쪽)

너는 이미 구축된 우정에 이방인으로서 합류하기보다는 네 눈앞에서 구축되는 우정을 선호했다. 너는 이 후자의 우정이 태어나고 자라는 것을 봤다. 무슨 특별한 관심이 서로를 엮을지 예상할 수는 없지만, 너는 모두가 동시에 시작함으로써 미래 앞에서 평등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65쪽)

너는 제스처가 몇 분 안에 이루어지고 그 흔적이 간직돼서 오랫동안 보일 수 있는, 오랜 반향을 가진 행동들만을 하고 싶어 했다. 너는 물질성 안에서 정지된 시간 때문에 그림에 관심을 가졌다. 그림을 그리는 짧은 시간은 그림의 긴 수명에 의해 계승된다.(68쪽)

너는 혼자 있을 때 지루한 것과 여럿이 있을 때 지루한 것을 두려워했다. 하지만 너는 둘이서 얼굴을 맞대고 있을 때 지루한 것을 무엇보다도 가장 두려워했다. 너는 자극이 없는 기다림의 순간들에 어떠한 미덕도 부과하지 않았다.(90쪽)


차례

작가에 대하여
이 책에 대하여

자살

옮긴이의 글
에두아르 르베 연보


지은이

에두아르 르베(Édouard Levé, 1965–2007) — 사진과 글을 주요 매체로 삼아 활동한 프랑스 작가. 1965년 1월 1일 파리 근교에서 태어난 르베는 20대 중후반에 그림을 그렸지만, 서른 즈음 인도 여행을 다녀온 후 사진을 찍기 시작한다. 이후 자신에게 영향을 준 예술가들과 이름이 같은 이들을 전화번호부에서 찾아 찍은 「동명이인」, 꿈을 현실에서 재구성한 「재구성된 꿈」, 공포, 불안이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마을을 기록한 「앙구아스」, 신문에 실린 회담, 공식 방문, 준공식 등의 사진에서 고유명사 등을 제거하고 전형적인 인물들의 포즈를 재구성한 「뉴스」, 포르노그래피 속 자세와 구도를 옷을 입은 채 재구성한 「포르노그래피」, 일상복을 입은 인물들이 럭비선수의 포즈를 취하는 「럭비」, 회화를 사진으로 재구성한 「이전(移轉)」, 유럽의 도시와 같은 이름을 가진 미국의 도시를 촬영한 「아메리카」, 흑백사진 연작 「픽션」 등 개념적인 사진 작업에 매진한다.
한편 2002년에는 533개 작품 아이디어를 모은 『작품들』을 프랑스 출판사 P.O.L에서 출간하면서 문학가로서 남다른 이력을 시작한다. 이어 2004년 『저널』을, 2005년 『자화상』을 같은 출판사에서 펴낸다. 2007년 10월 15일, 파리에서 자살한다. 이듬해에 자살 며칠 전 송고된 글 『자살』이 출간된다.

옮긴이

한국화 —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미술을, 파리8대학에서 문예 창작을 공부했다. 올리비아 로젠탈의 『적대적 상황에서의 생존 메커니즘』과 모니크 비티그의 『오포포낙스』 등을 한국어로, 황정은의 『백의 그림자』(공역)를 프랑스어로 옮겼다. 프랑스에서 단편집 『도시에 사막이 들어온 날(Le jour où le désert est entré dans la ville)』을 출간했다.


편집

김뉘연

디자인

김형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