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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탈로스의 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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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탈로스의 신화

노정태 지음

조각난 현재를 재구성하는 시대착오적 글쓰기

도미노 총서 첫 번째 책의 제목은 “탄탈로스의 신화”이다. 알베르 카뮈의 『시지프 신화』를 떠올리게 하는 이 책은 2016년 현재 우리 앞에 놓인 삶의 조건들을 다루다. 그러나 현재를 논하기에 앞서, 저자는 그 어려움을 토로한다. “과거‘들’이 어지럽게 뒤섞여 현재를 이루고 미래를 잠식하는 오늘날” 현재에 대해 이야기하는 일은 과거 그 어느 때보다 힘들어진 탓이다. 단순히 과거를 돌아보고, 미래를 재단하는 것만으로 현재는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말년의 양식에 대하여』(에드워드 사이드)에 나오는 아도르노의 ‘시대착오적’ 글쓰기를 언급하며, 저자는 시대착오적 글쓰기가 힘을 발휘하려면 (아도르노 시절과 달리) 먼저 현재를 구성해낼 필요가 있음을 말한다.

이를 위해 저자는 ‘소실점’이라 이름 붙인 1부에서 한국과 일본, 미국을 일주하며 “‘미래인 과거’, 혹은 ‘과거인 미래’들을” 살핀다. 의도적으로 배치된 순서를 따라 저자는 한때 자신의 우상이었던 진중권의 지적 궤적을 추적하고, 세상에 근본이 되는 무언가를 쓰기 위해 고군분투해온 아즈마 히로키가 꿈꾸는 새로운 민주주의가 이미 대한민국에 상당히 끔찍한 모습으로 제시되어 있음을 폭로하고, 거의 비인격적인 차원의 시선으로 문명과 인류의 미래를 위한 보고서를 작성해온 제래드 다이아몬드가 그 문명과 함께 서서히 늙어감을 목도한다.

일종의 막간극처럼 배치된 1.5부 ‘스테일메이트’는 전통적인 두뇌 게임이자 종종 세계에 대한 비유로 사용돼온 체스 이야기이다. 보비 피셔, 가리 카스파로프 등 체스 영웅들을 둘러싼 이야기는 그러나 어느덧 불과 얼마 전만 하더라도 계속될 것이라 믿었던 세계가, “지난 세기의 관성으로 유지되어온 것들이, 멈춰버리고 있음을” 드러내는 장치가 된다.

2016년 우리 눈앞에 펼쳐진 탄탈로스의 삶

‘돌파구’라 이름 붙은 2부에는 그리하여 2016년 우리가 처한 현실, “소실점이 사라지거나 흩어져버린, 혹은 너무 많아져버린 지금,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세상을 바라보고 그 속에서 판단하며 행동할 수 있을지, 작은 실마리라도 쥐어보기 위한 노력의 산물이 담겨 있다.”

플라톤의 삶과 그가 제시한 ‘동굴의 비유’, 그리고 이에 대한 하이데거의 해석을 논하며 그들이 각자 자신이 처한 당대의 현실 속에서 진리를 발견하기 위해 어떤 선택을 했는지 (혹은 우리는 우리의 동굴에서 어떤 투쟁을 시작할 수 있는지) 가늠하고, 예수를 본받으라는 불가능한 미션을 통해 자신을 지탱해온 기독교의 가르침과, 인간이기에 모방할 대상을 찾을 수밖에 없는 우리의 처지를 곱씹는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뛰어넘어 우리에게 쇄도하는 것은 이 책의 제목이자 마지막에 등장하는 탄탈로스의 신화다. 『오뒷세이아』를 통해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아무리 목이 말라도 눈앞의 물을 마실 수 없고, 아무리 배가 고파도 머리 위의 열매를 먹을 수 없는, “영원한 허기와 갈등의 형벌을 겪고 있는 탄탈로스”. 저자는 현재 우리의 모습이 바로 그와 같다고 말한다.

“이제 우리의 고통은 시지프스적인 것이 아니라 탄탈로스적인 것에 더욱 가까워졌다. 저 높은 정점을 향해 돌을 밀어 올리는, 파괴될지언정 무언가를 건설해나가는 그런 달콤한 근육통은 우리에게 허락되어 있지 않다. 대신, 하루 종일 일하고 번 돈으로 월세 내고 빚 갚고 나면, 간신히 하루의 필요 칼로리를 추가 섭취하며 더불어 몇 배의 나트륨을 축적하지 않을 수 없는 그런 기나긴 빈곤의 삶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왕년의 시지프스들이 은퇴를 하고 나면, 대부분의 청년들은 그들의 부모와 함께, 탄탈로스적 삶을 살 수밖에 없을 것이다. 허우적거리고 팔을 휘저어 간신히 유지되는 삶 말이다.”

“그렇게 청춘을 살아보기도 전에 이미 늙어버린 우리, 탄탈로스들. 꿈은 높지만 현실은 시궁창인 탄탈로스들. 잡을 수 없는 꿈과 이룰 수 없는 삶의 안정을 둘 다 가질 수 없다고 선고받은 탄탈로스의 운명. 너는 네가 살고 있는 그 늪에서 영원히, 가질 수 없고 누릴 수 없는 것들을 평생 동경하면서, 기나긴 노년만을 살아갈 것이라는 종말의 선고. 그것이 오늘날의 우리에게 주어진 탄탈로스의 신화다.” 그 깊은 늪 속에서 저자는 이렇게 묻는다. “시지프스적 주체에서 탄탈로스적 주체로 이행하게 된, 산을 오르는 게 아니라 늪에 잠겨 있어야 하는 이 부조리 속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떻게 인간일 수 있을까.”

이 책에는 10여 년 전 청년 논객으로 등장해, 자신이 살아가는 세상의 본질을 고민하며, “최선을 다해 에세이스트이고자 했으며, 에세이스트가 아닌 그 무엇도 되고자 하지 않”았던 저자의 성찰이 모두 담겨 있다. 요컨대 『탄탈로스의 신화』는 가장 철저한 의미에서 에세이라는, 귀한 계보에 속하게 되는 셈이다.


도미노 총서에 대하여

2011년 창간 때만 해도 『도미노』에 주목하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주목한다 한들 그 정체를 말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만큼 형식과 내용, 편집 동인과 필자 등 모든 면에서 낯선 잡지였다. 그러나 거기에 실린 내용마저 무시할 수는 없었다. 제도나 권력의 부름을 받지 않은 일군의 젊은 필자들이, 현재 그들이 처한 상황을 고민하고, 세상을 향해 발하는 자생적인 목소리. 성 소수자, 페미니즘 등 다양한 관심사를 가진, 그러나 같은 곳을 바라보는 필자들이 내놓는 독특한, 가볍거나 무거운, 뜨겁거나 차가운 목소리는 디자이너 듀오 홍은주 김형재의 손끝을 거쳐 세상에 나왔고, 문화계 변방에서 외연을 넓혀온 ‘독립 잡지’ 특유의 에너지를 내뿜으며 호를 거듭할수록 주목을 받았다.

『도미노』가 창간된 지 어느덧 5년, 그 시간 동안 무엇이 달라졌을까. 우선 그들이 꾸준히 탐색해온 세상의 수상한 움직임들이 점점 현실화되었다. 2000년대 말부터 격화하기 시작한 신자유주의 시대의 균열은 점점 커다란 파열음을 내고 있으며, 늙어가는 세대는 청년들이 사라진 자리에서 청년들을 찾는다. 우리는 IS의 등장이나 브렉시트와 함께 전 세계적 시스템의 붕괴를 두 눈으로 목격하고 있으며, 상식이 통하지 않는 소통과 혐오를 피부로 느끼며 살아간다. 기존 제도는 새로운 무언가가 나타나 이 혼란의 밧줄을 끊어주길 (혹은 끊어진 밧줄을 이어주길) 바라지만, 새로움에 대한 강박에 짓눌려 그 공식만을 답습하는 모습을 우리는 목도하곤 한다.

이제 도미노는 전열을 정비하고 총서의 형태로 세상에 선을 보인다. 인문, 사회, 문학, 미술, 여성사 등 『도미노』가 다뤘던 거의 모든 이슈를 총괄하며,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줄 것이다. 그동안의 활동을 갈무리하고, 다가올 시간을 맞이하며, 다양한 문화를 이야기하고, 새로운 것이 아닌 필요한 임무를 수행하는 총서가 될 것이다.


발췌

지금까지 나는 이 글을 통해, 아도르노의 개념을 빌어 사이드가 말한 시대착오적 에세이의 개념을 전달하고, 그 전제가 되는 시대착오가 왜 오늘날에는 형해화되어 버렸는지 설명했다. 그런데 어떻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역시 에세이를 썼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부정에 부정에 부정으로 이어지는 끝없는 부정변증법은 결국 어떤 비-언어의 상태에 도달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시대착오가 불가능한 시대에 시대착오적인 글쓰기는 과연 어떻게 가능한가?

유럽의 만만한 ‘강소국’들이 부쩍 롤 모델로 제시되고 있는 것 또한 현재, 혹은 아직도 ‘과거인 현재’를 규정짓는 특징 중 하나다. 덴마크식 교육, 스웨덴의 전설적 사민주의 정치인 비그포르스가 이룩해낸 잠정적 유토피아의 꿈, 마리화나와 성매매마저도 자유로운 네덜란드, 핸드폰 팔아서 먹고살던 핀란드, 노키아가 망하니까 앵그리버드로 다시 세계를 호령하는 작지만 강한 나라 핀란드 등등. 전략 지도는 온데간데없고, 관광 엽서에 대한민국의 미래를 그리는 것이 우리의 ‘오늘’이다.

아즈마 히로키는 민주주의의 본래적 기능과 작동, 특히 그것의 핵심이 되는 개인의 존재를 ‘낭만적 거짓’의 영역으로 슬쩍 밀어내버리고, 대신 ‘통계적 현실’을 끼워 넣어 새로운 민주주의를 만들고자 한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이미 ‘통계적 현실’이 ‘낭만적 거짓’을 압도하고 있었다. 국민은 개새끼이지만 역사는 위대한 선택을 할 것이고, 따라서 대선 승리를 위해 여론조사 결과에 기반하여 대선 후보를 단일화해야 한다는 논리 구조는 오늘날 우리에게 전혀 낯설지 않다. 오히려 그런 과정이 없으면 유권자들이 직접 요구하고 나서기도 한다. 어서 우리를 ‘숫자’로 파악해서, 더 큰 숫자에 뭉쳐 넣어, 이기는 선거를 하라고.

일상의 영역, 미시적인 세계로 내려와 보면 사정은 더욱 심각하거나 한심하다. 모든 지식이 공개된 세상이기에 그 누구도 지적으로 성장하지 않는다. 오직 컴퓨터만을 상대로, 가장 낮은 수준의 인공지능을 설정한 후, 상대방을 농락하다가 스테일메이트로 무승부를 잔뜩 쌓는 그런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위키피디아를 지식으로, 나무위키를 상식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이, 네이버 지식인 검색 결과를 놓고 ‘저런 걸 믿냐’며 손가락질하는 세상이다. 파편화된 정보들이 너무도 큰 수적 우세를 점하고 있는 탓에, 무지와의 투쟁에서, 인류는 체크메이트에 의한 승리가 아닌 스테일메이트에 의한 무승부만을 거두고 있는 것이다. 계몽의 시대는 끝나지 않았지만 이제는 그 누구도 계몽될 수 없는 것 같다.

시시하고도 잔인한 세상 속에 살고 있다. 탄탈로스의 신화를 경제적 차원에서 먼저 해석할 수밖에 없는 이들에게, 세상은 잔인한 곳이다. 그에 대해서는 추가적인 설명이 불필요하다. 하루 벌어 하루 사는, 한 달 벌어 한 달 사는 사람들의 단순한 집합체에 지나지 않기에, ‘사회’라는 단어는 그 적용처를 상실한 지 오래다. 노인들은 자살하고 있으며, 아기들은 태어나지 않는다. 잔인한 세상 속에서 가장 약한 자들이 먼저 사라져간다.

시지프스적 주체에서 탄탈로스적 주체로 이행하게 된, 산을 오르는 게 아니라 늪에 잠겨 있어야 하는 이 부조리 속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떻게 인간일 수 있을까. 가질 수 없는 욕망과 닿을 수 없는 로망 속에서, 일상의 곤궁과 허기를 간신히 채워가는 와중에도, 어떻게 존엄할 수 있을까. 카뮈는 그 모든 부조리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행복한 시지프스를 상상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탄탈로스를 그려볼 수 있을까.


차례

들어가며: 시대착오에 대하여

1부 소실점
에레베스트에 대하여
낭만적 거짓과 통계적 현실
어제까지의, 오늘부터의

1.5부 스테일메이트

2부 돌파구
진리와 동굴
그리스도를 본받아
탄탈로스의 신화


지은이

노정태는 대학에서 법학을, 대학원에서 철학을 공부했다. 국제 정치 전문지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의 한국어판 편집장을 역임했다. 『아웃라이어』(2009), 『마이크로스타일』(2011), 『진보의 몰락』(2013), 『기적을 이룬 나라, 기쁨을 잃은 나라』(2013),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2015)를 번역했고, 『논객시대』(2014)를 썼다. 현재 자유 기고가로 활동하고 있다.


편집

박활성

디자인

홍은주 김형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