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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의 사물들: 악보, 자동 악기, 음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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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의 사물들: 악보, 자동 악기, 음반

신예슬 지음

일반적으로 음악은 소리와 시간의 예술로 이해된다. 여기에 과하거나 동의하지 못할 부분은 없다. 그러나 만약 애초에 음악이 공간적으로 존재할 가능성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사물로서 인식되고, 사물을 통해 비로소 소리로 번역되는 것이 음악이었다면 어땠을까. 음악 비평가 신예슬의 『음악의 사물들』을 읽다 보면 드는 생각이다. 이 책은 음악에서 비롯했으나, 음악의 도구에서 벗어나, 음악의 가능성을 발견한 사물들을 다룬다. 구체적으로 작곡가의 악상을 기록하는 악보, 인간의 연주를 대체하는 자동 악기, 소리를 기록하고 재생하는 음반이 그 주인공이다. 그들을 따라 음악에 대한 질문이 연쇄한다.

악보가 말하지 않는 것

클래식이라 일컫는 서양 음악의 전통에서 우리는 작곡가가 악보에 기록한 음악 ‘작품’을, 연주자의 연주를 통해 듣는다. 그러나 우리가 듣는 것이 과연 그 작곡가가 남긴 작품이 맞을까? “연주는 종종 이미 만들어진 작품에 대한 해석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그 해석의 대상이 정확히 무엇인지 묻는 순간 모든 것이 모호해진다. 해석의 대상은 물론 우리가 작품이라고 부르는 것이겠으나 연주자가 손에 쥔 것은 악보고 우리가 작품이라고 부르는 대상은 악보가 아니며, 악보에 그 음악의 모든 것이 다 적혀 있다고 확언하기도 어렵다.” 저자는 처음부터 독자를 오리무중에 빠뜨리고서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 악보에 적혀 있는 것들이 과연 무엇인지 알아보는 것이다.

무너지는 다섯 개의 선

악보에 적혀 있는 것, 적히지 않은 것, 적을 수 없는 것, 악보 너머로 나아가는 것, 악보가 말하지 않는 것. 20세기 들어 작곡가들은 악보에 의문을 품기 시작한다. 그 이전까지의 악보가 작곡가의 머릿속에 떠오른 악상을 최대한 충실히 옮겨 적기 위해 다양한 기호들을 추가해 나갔다면, 현대 작곡가들은 공고히 구축된 오선지를 흔들기 시작한다. 기호를 없애고, 변형하고, 나아가 전혀 다른 기보법을 실험하기 시작한다. 두 번째 장, 「무너지는 다섯 개의 선」은 존 케이지를 비롯해 알반 베르크, 에릭 사티, 쇤베르크, 슈토크하우젠, 펜데레츠키, 루치아노 베리오, 캐시 버버리언, 코닐리어스 카듀에 이르기까지, 악보라는 매체에서 출발해 음악의 가능성을 탐구한 사례를 다룬다. 그러다 만만치 않은 상대와 마주친다. 단순히 음악의 기록으로서 가능성을 탐색하는 데 머물지 않고, 음악을 ‘읽기’를 요구한 작업이 있었기 때문이다.

듣는 음악에서 읽는 음악으로

책은 음악에 포섭될 수 있을까. 음악은 ‘읽기’의 대상이 될 수 있을까. 독일 작곡가 디터 슈네벨이 펴낸 ‘모-노, 읽기 위한 음악’(MO-NO, Musik zum Lesen, 이하 ‘모-노’)이 던진 질문이다. 3장 「듣는 음악에서 읽는 음악」으로는 순전히 이 책 하나를 다루는 데 집중한다. “그러나 첫 줄에 작품 제목을 기입하던 순간, 문제가” 생긴다. “이 제목을 일반적으로 단행본을 표시하는 겹낫표 안에 넣을 것인가, 혹은 음악 작품 제목을 표시하는 홑낫표 안에 넣을 것인가 하는 문제 말이다. 우선은 이 제목을 작은따옴표로 묶은 채 이야기를 계속해 보자.” 텍스트와 그래픽 기보, 오선보, 사진 및 그림 등이 섞인 ‘모-노’가 음악이 되기 위해서는 어떤 전제 조건들이 필요한가. 거기에 적힌 내용이 ‘음악적’이라면 그건 무엇을 뜻하는가.

스스로 연주하는 악기의 탄생

소위 18~19세기 서양 음악의 전통에서 음악은 작곡가, 연주자, 청자라는 3인의 구도 안에서 이뤄졌다. 여기서 연주자는 빠질 수 없는 요소였으며, 연주는 늘 인간의 존재를 전제로 했다. 그러나 산업혁명 이후 많은 영역에서 기계가 인간을 대체하기 시작하자, 꼭 연주를 사람이 할 필요도 없어졌다. 19세기 말 등장한 ‘피아노플레이어’는 사람 대신 피아노를 쳐 주는 기계였다. 아직 축음기가 조악한 소리만 들려주던 시절, 사람들은 피아노-플레이어에 열광했다. 초기의 불완전한 기능은 빠르게 개선되었고, 곧이어 바이올린 플레이어, 트럼펫 플레이어가 등장했으며, 급기야 벽을 가득 채운 오케스트라 편성까지 등장한다. “남은 과제는 분명했다. 이 악기가 인간 없이 얼마나 더 인간처럼 스스로 연주할 수 있게 만드냐는 문제였다.”

피아니스트의 유령

초반에 등장한 피아노 플레이어는 악보에 적힌 음표를 이진법으로 롤에 기록해 단순한 연주만 가능했지만, 곧이어 연주에 필요한 여러 효과들이 추가되기 시작했고, 나아가 연주자의 연주를 그대로 롤로 기록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리프로듀싱 피아노’의 등장이었다. 제작사들은 “실제 피아니스트의 연주를 그대로 들을 수 있다’는 대대적인 모토를” 내세우고 당대의 피아니스트를 섭외해 연주를 롤에 기록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음악의 저자성도 변화하기 시작한다. 과거에 악보가 작곡가의 저자성을 담보했다면, 연주가 사물로 기록되기 시작하자 연주자도 저자가 될 수 있었다. 나아가 애초에 자동 악기에 잠재해 있던 새로운 음악의 가능성들이 탐구되기 시작한다.

자동 피아노를 위한 연습곡

사람이 꼭 연주를 할 필요가 없다면, 사람을 상정하지 않은 음악도 가능하지 않을까. 작곡가들은 곧 자동 악기에 숨은 잠재성을 파악하고 사람 너머에 있는 음악을 탐구하기 시작한다. 6장 「자동 피아노를 위한 연습곡」은 한스 하스의 「인터메조」, 파울 힌테미트의 「기계적 피아노를 위한 토카타」, 에른스트 토흐의 「벨테미뇽 전자 피아노를 위한 세 개의 소품」과 「기계적 오르간을 위한 연습곡」, 스트라빈스키의 「피아놀라를 위한 연습곡」, 그리고 자동 피아노의 가능성을 극악무도한 수준까지 추구했던 콘론 낸캐로우의 ‘자동 피아노를 위한 연습곡’ 연작을 다룬다. 이들이 추구한 음악적 가능성은 “자신의 곡에 종종 사람의 손으로는 도저히 연주할 수 없는 부분을 포함해 놨던 찰스 아이브스”의 다음 말로 요약할 수 있다. “사람에게 손가락이 열 개밖에 없는 것이 작곡가의 잘못인가?”

소리를 재생하는 기계

20세기 초반 호황을 누렸던 자동 악기들은 축음기의 발전과 함께 빠르게 역사에서 잊히게 된다. “기술의 갱신과 암투와 도적질이 횡행하며 기업들의 흥망성쇠가 이어지던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 발명가와 사업가들은 유럽과 미국 동부를 중심으로 포노그래프, 그래포폰, 토킹 머신, 그라모폰, 빅트롤라 등 각자의 이름으로 축음기와 당대 최고의 음악을 담은 음반을 판매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흥미로운 일들이 벌어진다. 음반은 자신이 들려주는 소리가 ‘실제 연주’와 다르지 않다고 주장하기 시작했으며, 곧이어 연주는 자신이 ‘음반처럼’ 완벽하다고 주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충실할 것을 요구하는 이 묘한 상황에 대한 관찰은 우리가 음악에서 듣기를 바라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 묻는 일과 다르지 않다.

예술 형식으로서 음반

녹음 및 재생 기술의 역사는 지속적인 노이즈 제거를 통해 발전해 왔다. 녹음 과정에서 연주 소리 이외에 끼어들 수 있는 노이즈들은 물론, 재생 과정에서 음반이 내는 온갖 노이즈들은 제거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음반 자체의 소리가 음악 안으로 포섭되기 시작한다. 8장 「예술 형식으로서 음반」은 1930년 음반 재생 기법을 이용해 음악적 가능성을 탐구한 그라모폰무지크부터, 어쩌면 음악이 지금과는 전혀 다른 존재가 됐을지도 모를 제안을 했던 알렉산더 딜만과 라슬로 모호이너지, “음반만이 들려줄 수 있는 그 특유의 소리를 음악적으로 이용하는” 턴테이블리즘이나 케어테이커의 사례까지 음악으로서 매체의 가능성을 살핀다.

소리의 오브제 , 구체 음악

악보, 자동 악기, 음반. “일반적으로 음악의 현장에서 이 사물들이 딱히 주목받을 필요는 없었다. 음악을 충실히 기록하거나 되살려 낸다는 제 기능을 완수한 뒤 사라지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 사물들은 그 “음악의 존재론적 조건으로 기능”했고, 지금까지 그 조건을 살피며 떠오른 질문들은 간단치 않았다. 그 질문들을 하나로 요약하면 ‘음악이란 무엇인가’, 혹은 ‘음악적 경험이란 무엇인가’일 것이다. 결국 이 책은 답하기 어려운 이 질문에 대한 실마리를, 손에 잡히는 사물들부터 찾아보려는 일련의 시도이다. 그리고 마지막 장의 주인공은 사물을 넘어, 세계의 모든 소리를 음악의 재료로 사용할 것을 제안했던 피에르 셰페르의 구체 음악이다. 음악은 소리의 예술이지만 모든 소리가 음악이 아니라면, “음악이 아닌 소리는 무엇이 되고, 음악을 듣는다는 것의 의미는 어떻게 변화할까.”


차례

서문
악보가 말하지 않는 것
무너지는 다섯 개의 선
듣는 음악에서 읽는 음악으로
스스로 연주하는 악기의 탄생
피아니스트의 유령
자동 피아노를 위한 연습곡
소리를 재생하는 기계
예술 형식으로서 음반


책 속에서

음악의 본질이 도식화될 수 있는 구조물 같은 것이라면 이는 악보에 적혀 있는 음표들에 내재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소위 ‘음 구조’라 부르며 어떤 음악에 학술적으로 접근할 때 분석의 대상(화성, 선율, 리듬 등)으로 삼는 바로 그것. 하지만 여러 질문들이 뒤따른다. 우리가 작품이라고 통칭하는 것이 반드시 그 음 구조에만 그치는 것일까. 소리를 경유하지 않은 그 정보들을 작품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우리가 음악 작품에 기대하는 것은 과연 기보되어 있는 것들뿐일까. 연주자들은 그 기보되어 있는 것들만을 소리로 실현시키면 그 작품을 온전히 연주하는 것일까. 음악 작품은 그 악보에 숨어 있다는 결론이 내려지고, 추적은 완료된 것일까.

오선이 담보하던 선형적 시간이 부서지자 우리가 ‘작품’이라고 불러 왔던 대상도 이전과 다르게 재조정될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클라비어슈티크 11번」에서 ‘작품’은 작곡가가 기보하려는, 그리고 연주자가 실현하려는 ‘소리의 상’에서 멀어져 사건의 출발점에 놓인 ‘재료와 규칙’에 가까워졌다. 이러한 종류의 음악은 소리를 듣고 그것이 무슨 작품인지 곧장 판단할 수 없게 하고, 소리를 기준으로 그 작품에 대한 최소한의 합의를 마련할 수 없게 한다. 「클라비어슈티크 11번」이 「클라비어슈티크 11번」임을 알 수 있게 하는 것은 음 구조가 아니라 ‘내가 연주하는 것이 이 작품이다’라는 연주자의 호명이었다.

사람과 피아노 사이에 피아노-플레이어라는 사물이 끼어들자 우리가 ‘연주’라고 생각해 왔던 개념이 점차 어수선해지기 시작했다. 연주에는 언제나 사람의 행위가 전제되어 있었고 악기는 인간과 음악적인 관계를 맺는 사물이었다. 피아노플레이어는 이 연주의 기본 전제들을 서서히 바꾸어 나갔다. 인간은 연주라는 행위에서 한 발짝 멀어졌고, 기계의 움직임도 연주의 영역으로 포섭됐고, 피아노-플레이어를 조작하는 사람은 연주자이자 청취자가 됐다. 인간과 악기가 맺어 왔던 ‘연주’라는 공고한 관계에 작은 균열이 생겼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 기계 장치가 꼭 연주자를 대신할 필요는 없었다. 그럴 필요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인간이라는 기준점만 제거한다면 오히려 생각지도 못한 수많은 음악적 가능성을 발견할 수도 있었다. 자동 피아노에서는 인간의 손 크기에 적합하게 설계된 옥타브 언저리를 맴돌지 않은 채 그보다 훨씬 멀리 있는 음들도 동시에 누를 수 있었고, 단 한순간도 지치지 않고 영원히 타건을 이어갈 수 있었고, 열 개의 손가락이라는 제한 없이 수많은 음을 동시에 누를 수도 있었고, 인간의 손으로는 결코 구현할 수 없는 아주 두꺼운 화음의 트릴 같은 불가능한 테크닉도 가능했다.

결국 녹음 현장에서 벌어진 사건은 실황이 궁극적으로 추구해 왔던 사건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런 상황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았던 음악가들은 마이크 앞에서 더 극적인 비브라토를 해 대거나 개량된 악기를 쓰는 등 무대에서와는 달리 녹음에 적합한 방식을 취했다. 음반이 모든 노이즈를 걷어 내며 끝끝내 충실하고자 했던 그 원본의 실체는 실황이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녹음 현장은 때로 실황을 재구성했다. 음반은 실황의 사본이 아니라 누군가 녹음으로서 이상적이라고 여긴 가상의 음악에 가까웠다.

조각의 방식으로 음악을 만들 수 있었다면 음악이 존재하는 형태는 지금과는 한층 달라졌을 것이다. 음악의 원본 형태는 시간 위에서의 경험이 아니라 시공간 안에 존재하는 사물에 가까웠을 것이고, 그 사물은 눈으로 볼 수 있는 아주 미세한 악보인 동시에 연주하는 악기이자 소리의 정보들이 물화되어 현현한 것이나 다름없었을 테다. 그렇다면 어쩌면 음악이 지금처럼 시간과 경험에 잠재된 것이 아니라 사물과 공간에 잠재된 것이라고 생각했을지도, 음악의 시간성보다 공간성이 더 중요하게 여겨졌을지도, 음악은 음각되는 것으로 통용됐을지도, 음각된 모든 사물은 음악의 가능성을 잠재하고 있는 것으로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

구체 음악은 세계에서 들려오는 모든 소리를 음악의 재료로 포용했다. 이는 그 모든 소리를 음악으로 규정하겠다는 태도보다는 우리가 그것을 음악의 재료로 들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안하는 것에 가까웠다. 즉, 구체 음악이 추동한 것은 “듣기의 기술”이었다. 다만 음악에는 신체가 없는 탓에 세계 속을 떠도는 특정한 소리를 흘려보내지 않고 일종의 오브제처럼 대상화하여 자세히 듣기 위해서는 녹음 기술이 필요했지만, 지난한 창작 과정과 고민을 거친 구체 음악이 정말로 조율한 것은 단순히 음악과 구체 음악의 비좁은 관계가 아니라 세계의 소리와 음악의 관계, 그리고 소리를 음악적으로 듣는 새로운 태도였다.


지은이

신예슬은 음악 비평가이자 헤테로포니 동인이다. 유럽 음악과 그 전통을 따르는 근래의 음악에 관한 의문으로부터 비평적 글쓰기를 시작했다. 서울대학교에서 음악학을 공부했고, 2013 객석예술평론상과 2014 화음평론상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