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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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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니스와프 이그나찌 비트키에비치 지음, 정보라 옮김

스타니스와프 이그나찌 비트키에비치의 소설 『탐욕』이 워크룸 문학 총서 ‘제안들’ 35권으로 출간되었다. 20세기 초 극작가, 소설가, 화가로 활동했던 폴란드 아방가르드 작가 비트키에비치의 대표적인 장편소설로, 작가의 희곡집 『광인과 수녀 / 쇠물닭 / 폭주 기관차』(‘제안들’ 34권)와 함께 펴낸다. 소설과 희곡 모두 슬라브어권 문학작품을 국내에 오래 알려 온 번역가이자 소설가 정보라가 한국어로 옮겼다.

가상의 디스토피아를 통과하는 성장기

『탐욕』은 비트키에비치가 쓴 작품 중 가장 긴 장편소설이자 그의 대표작이다. 1930년에 출간된 소설의 배경은 가상의 미래로, 중국에서 시작된 공산주의가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 그 가운데 유럽에서 유일하게 민주주의를 지키고 있는 폴란드에서는 신흥종교가 유행 중이다. 19세 폴란드인 남성 주인공 게네지프 카펜은 이러한 디스토피아를 살아가면서 ‘깨어남’(1부)을 겪은 후 ‘광기’(2부)에 휩싸이게 된다. 소설은 이 과정을 담고 있다.
게네지프는 결혼 전 백작이었던 어머니와 양조장 주인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내가 있는 남성 음악가 텐기에르와 처음 성 경험을 한 그는 남편이 있는 티콘데로가 공주의 애인이 되었다가, 여동생 릴리안의 공연에서 배우 페르시를 만나 사랑에 빠지지만, 다른 이와 결혼하게 된다. 한편 아버지가 죽기 전 신청해 둔 군사학교에 입학한 그는 두 번의 살인과 전투를 겪고, 이제 중국인이 지배하게 된 폴란드에서 변절해 살게 된다.
비트키에비치는 실제 삶에서 제1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전쟁터에 방치되는 경험을 했고,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던 달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장르를 가로지르는 그의 활발한 창작 활동은 전쟁과 전쟁 사이에 벌어졌던 일이다. 작가의 대표적인 소설이 허무한 비극으로 향하는 가상의 시간 속에 온갖 종류의 혼란을 겪는 성장기의 청년을 주인공으로 삼고 있음이 자연스럽게 여겨지는 배경이다.
“이것은 비트키에비치가 내다보았던 어두운 미래에 관한 디스토피아 소설인 동시에 게네지프의 성장기이기도 하다. 폭풍 같은 청(소)년기를 거치면서 사랑과 질투와 분노와 도취와... 등등 온갖 감정을 경험한 뒤 남는 것은 무미건조하고 평범한 성년기이다. 그렇게 어른이 되는 것이다.”(「옮긴이의 글」 중에서)

도취

이 모든 폭풍 같은 과정 속에서 등장인물들은 약을 취한다. 시대가 허용했기에 가능했지만 실제로 비트키에비치는 각종 약물을 시도하면서 작품 활동을 펼친 점으로도 유명한 작가다. 그는 마약류를 실험적이고 적극적으로 사용하면서, 즉 어떤 향정신성의약품을 취하면서 그림을 그리고 글을 썼는지 세세히 기록해 가면서 자신이 예술 이론에서 주창한 바 있는 ‘순수한 형태’(형이상학적이고 추상적인 고양감과 절대적인 아름다움)에 가능한 한 도달해 보려 했다. 작가가 그리했듯이, 『탐욕』의 등장인물들 역시 곳곳에서 상황에 따라 다종다양한 약들을 취한다. 그러면서 소설 역시 모종의 약에 취해 버린 듯이 흘러간다. 작가가 만들어 낸 폴란드어 신조어에 러시아어와 독일어와 프랑스어와 영어가 뒤섞이고 의미 없는 말놀이에 줄표와 괄호 등 문장부호가 과도하게 등장하고 온갖 작가와 작품 인용이 난무하고 이야기가 진행되다가 인물들의 대사가 희곡 형식으로 끼어들고 주요 내용을 보충하는 내용이 본문과 별도의 단락으로 처리되는 등, 비트키에비치의 문장들은 걷잡을 수 없이 뻗어 나가며 계속해서 낯선 지점을 건드리고 관념의 영역을 확장해 나간다. 그러나 이 장편소설이 일반적으로 떠올릴 수 있는 소설의 형식을 완전히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 내용에 따라 부와 장이 적절히 나뉘고 대부분의 문장이 적절한 길이에서 마침표로 종결되는 등 익숙한 소설의 틀을 어느 정도 지켜 가며 그 안에서 최대한 종횡무진 나아가는 문체와 이야기에 당대의 정치와 예술에 대한 신랄한 견해가 얽히고설킨다. 그러면서 향하게 된 결말의 허무함은, 그 속성으로 보건대 작가의 미래를 살고 있는 지금의 삶과 그리 다르지 않을 수 있다. 그것은 이 장대한 소설이 약 1천 쪽에 걸쳐 증명해 두었듯이 약이 되었든, 사랑이 되었든, 혹은 문학을 비롯한 예술이 되었든, ‘광기’에 휩싸여 무언가에 ‘도취’되어야만 겨우 버틸 수 있는 종류의 것인지도 모른다. 적어도 작가와 소설 속 인물들은 그러한 삶을 살았다.


발췌

게네지프 카펜은 그 어떤 형태의 부자유도 참지 못했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그는 부자유에 대해서라면 도저히 어쩔 수 없는 혐오감을 내보이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언가 이해할 수 없는 기적으로 18년간 독재자 아버지의 훈련을 견뎌 냈다. 그러나 이것은 말하자면 용수철을 단단히 감는 것과 비슷했다. 언젠가 반드시 풀린다는 걸 그는 알고 있었고 그 덕분에 버텨 냈다.) 겨우 네 살이 될까 말까 했을 때 (이미 그때부터!) 그는 여름에 어머니와 가정교사에게 산책을 나가게 해 달라고 빌었는데, 쇠사슬에 묶인 채 위협적으로 그에게 덤벼들려 하는 잡종 개나 개집 문턱에서 조용히 깽깽거리는 조그맣고 우울한 강아지를 쓰다듬어 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묶인 것을 풀어 자유롭게 놓아주기가 절대로 불가능하다면 단지 쓰다듬어 주고 뭔가 먹을 것이라도 주려 했던 것이다. (15쪽)

난 소설을 쓸 거야, 예술에, 진정한 예술에 더 이상 할 일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을 때 소설을 쓸 거라고 — 하지만 소설은 형-이-상-학적이야! 이해하겠어? 그 썩을 ‘삶에 대한 이해’는 이제 됐어. 그런 건 재능 따위 하나도 없이 범속함을 엿보고 그따위를 좋다고 재창조하는 엿보기꾼들한테 남겨 주겠어. (56쪽)

이 모든 것은 매우 과장되었다. 이미 거의 아무도 예술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보기 드문 마니아들만이 소수의 제한된 모임 안에서 듣도 보도 못한 노력을 기울여 그 속물주의를 유지하고 있었다. (67쪽)

저는 선생님처럼 예술의 중요성을 믿지 않아요. 선생님의 개념은 실제 그 개념이 뜻하는 것보다 높습니다 — 관념으로서 스스로 자신보다 높아요. 왜냐하면 선생님은 그 관념들의 실제 기초의 가치를 과장하고 계시니까요. 저는 문학을 사랑하는데 그 이유는 문학 안에 저 자신의 삶보다 훨씬 풍성한 삶이 있기 때문이에요. 문학 안에는 현실에서 결단코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응축된 삶이 들어 있어요. 그 응축의 대가로 비현실을 지불하는 거죠. (104쪽)

모든 것의 위대함은 오직 예술 안에만 있어. 예술은 멧돼지가 접시를 들여다보듯이 그렇게 들여다보이는 삶의 비밀이야, 이해하겠어, 뭔가 만질 수 있는 것이지 어떤 관념들의 체계가 아니라고. (114–5쪽)

텐기에르는 점점 더 무시무시하게, 점점 더 도달할 수 없게 연주했다 — 그는 이 음악적으로 교양 없는 애송이가 사실은 적당한 청중임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언제나 이렇게 말했다. “내 음악을 위해서는 원시인이거나 아니면 슈퍼초울트라 세련된 전문가여야 해 — 중간은 악마에게나 가라지.” 사회 전체가 유감스럽게도 그 “중간”이었다.) 그는 즉흥연주를 하는 게 아니었다 — 이것은 ‘신들의 해방’이라는 제목의 교향악 대서사시를 피아노곡으로 개작한 것으로 1년 전쯤 작곡했다. 곡 스케치들을 모아 놓은 폴더에 그는 백배나 더 무시무시한, 거의 연주 불가능한 — 피아노곡으로서 그에게만 너무 어려운 것이 아닌 — 전반적으로 연주 불가능한, 풀어낼 수 없는, 음악적으로 발전시킬 수 없는 작품들도 가지고 있었다. “연주불가능것들”이라고 그 자신이 이름 붙였고, 그것은 절대적으로 불가능했다. 그런데도 그런 스케치 중 하나가, 그가 직접 말한 표현에 따르자면 이미 “삐약거렸고”, 악보는 적대적인 표시들의 괴상한 패턴으로 천천히 불어났으며, 그 표시들은 그 안에 세상의 심연 속에 홀로 남은 개인적인 짐승의 형이상학적인 포효를 잠재적으로 숨기고 있었다. 텐기에르는 갑자기 연주를 멈추고 유일하게 그에게 충실한 가축의 뚜껑을 쾅 덮었다. 짐승 같고 형이상학적인 밑바닥까지 뒤흔들린, 뭔가 형체 없는 인간 반죽처럼 으깨져 버린 게네지프에게 다가갔다. 의기양양하게, 짐승같이 말했다. (118–9쪽)

“…그리고 내게 약속해야 한다, 예술가가 되는 것만은 절대로 결단코 시도조차 해 보지 않겠다고. 알겠니?” (123쪽)

“형태야.” 그는 반복했다 “형태 그 자체, 존재의 비밀을 직접 표현하는 형태! 그 뒤엔 단지 어둠뿐이야. 이걸 이해하기에는 관념이 모자라. 철학은 이미 끝났어. 비밀리에 원인론이나 파헤치고 있을 뿐이지. 공식적으로 철학은 이제 대학에 학과도 없어. 다만 형태만이 아직도 뭔가 표현하는 거야.” (127–8쪽)

“그걸 이해하려고 하지 마라. 있는 그대로 가장 소중한 보물처럼 받아들여 낭비하지 말고 생각도 하지 마, 왜냐하면 넌 아무것도 생각해 내지 못할 테니까 — 오로지 괴상함이 죽은 관념들의 균사가 되어 너를 조각조각 뒤덮을 거다 — 이미 그렇게 돼 버린 사람을 내가 보여 주지 — 여기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걸 어떤 방식으로도 표현해서는 안 돼 — 심지어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라, 안 그러면 예술에 빠져 버릴 테니까, 날 보면 그게 어떤 냄새가 나는지 너도 알겠지. 점점 더 이상한 방식으로 난 이 모든 것을 갖고 싶고, 그걸 조절하기 위해 불가능성을 겹겹이 쌓고 있어. 그렇지만 이 짐승의 탐욕은 채울 수가 없어 — 그 어떤 것도 충분치가 않아. 그러고 이런 순간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보드카나 아니면 뭔가 더 나쁜 것에 익숙해지는 게 좋을 거다. 그런 뒤에는 이미 방법이 없어, 계속 가야만 하고, 제정신을 잃을 때까지 그 안에서 몸부림쳐야만 하지.”
“그런데 광기란 뭐죠?”
“고전적인 정의를 원하나? 현실과 내면의 상태가 합치되지 못한 채 일정 수준에 도달하여 주어진 환경에서 안전하다고 받아들여진 기준을 넘어서는 거지.”
“그럼 선생님도 역시 광인이군요? 선생님 음악은 위험하고 그 때문에 선생님은 인정받지 못하는 거예요.” (128–9쪽)

‘우리는 모두 죄수들이야, 자기 내면과 이 지구 상에 갇힌.’ 게네지프는 불분명하게 생각했다. (137쪽)

지금 그는 마치 이제 막 시작된, 미칠 듯이 흥미로운 이야기를 누군가 중간에 뚝 끊어 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아무것도 모르고, 자신이 어떤 사람이 될 것인지뿐만 아니라 지금 현재 어떤 사람인지조차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깨달았다. 그의 눈앞에 어떤 구멍이, 바닥 없는, 그러나 좁고 불편한 구멍이 입을 벌렸다. 발밑에서 세상이 마치 물로 씻어 낸 듯 사라졌다. 그는 그 심연 위에 몸을 기울인 채 매달려 있었 다. 그러나 어디로부터 몸을 기울인 것인가? 그 심연은 공간이 아니었다…. 자신에 대한 그 무지는 동시에 각성 이후의 상태로부터 완전히 달라진 의식의 정점이 되었다. 그는 자신이 아무것도, 그러니까 절대적으로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알았다.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게 지프치오는 그 구멍 안으로 날아들어 갔고, 계속 날아들어 가다가 여전히 루지미에쥬의 숲길에서 마치 눈 속에 파묻힌 것처럼 갑자기 멈추었다.
‘내가 어디 있었던 걸까 — 맙소사 — 어디 있었지?’ (140쪽)

그렇다 — 그냥 착한 사람이 되는 것, 그보다는 사람이 되는 것, 이것은 커다란, 정말 커다란 만족이다. 그것을 통해 모든 일이 얼마나 단순해지고 부드러워지고 쉬워지고, 기름이 배어들고 윤활유가 발리고 정신적으로 더러워지는지 — 그저 배설물투성이가 되는 것이다. 부르르르…. (153쪽)

분명히 말하는데 유일하게 확실한 건 내 사랑하는 기호들과 거기에서 나온 모든 것뿐이오, 수학과 한발 더 나아가 공학과 그리고 모든 것, 모든 것! 나머지는 불확실성의 현현일 뿐이오. 기호는 깨끗하지만 삶은 더럽고 지저분한 가정으로 덮여 있소. (173쪽)

그 형이상학에서 내려오시오, 나는 버텨 낼 수가 없으니까. (174쪽)


차례

작가에 대하여
이 책에 대하여

제1부
깨어남

제2부
광기

부록
『탐욕』 작가 서문

옮긴이의 글
스타니스와프 이그나찌 비트키에비치 연보


지은이

스타니스와프 이그나찌 비트키에비치(Stanisław Ignacy Witkiewicz, 1885–1939)는 폴란드의 아방가르드 극작가, 소설가, 화가다. 아버지와 이름이 같았기에 중간 이름 이그나찌와 성 비트키에비치를 합쳐 ‘비트카찌’라는 또 다른 이름을 지어 활동했다. 비트카찌는 크라쿠프 예술 학교에 다니면서 새로운 예술 사조들을 접하고, 1911년 첫 중편소설 「붕고의 622가지 몰락, 혹은 악마 같은 여자」를 발표한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당시 폴란드를 지배하고 있었던 러시아제국의 기병대에 입대하고, 1917년 전역한다. 1918년 폴란드로 귀환한 비트카찌는 이후 전시회를 열고 “S. I. 비트키에비치 초상화 회사”라 자칭하며 여러 초상화 기법을 실험하는 한편 희곡과 예술 이론, 소설 등을 두루 집필하기 시작한다.
부조리극의 선구 격인 비트카찌의 희곡은 예술이 형이상학적이고 추상적인 고양감과 절대적인 아름다움을 불러일으켜야 한다는 ‘순수한 형태’ 이론을 바탕으로 한다. 비트카찌는 희곡 「실용주의자들」, 「새로운 해방」, 「미스터 프라이스」, 「그들」, 「쇠물닭」, 「갑오징어」, 「광인과 수녀」, 「폭주 기관차」, 「피즈데이카의 딸 야눌카」, 「어머니」, 「벨제부브 소나타」, 「구두 수선공들」, 소설 『가을에 보내는 작별』과 『탐욕』, 예술 이론 「순수한 형태에 대하여」, 「미술의 새로운 형태와 그로 인한 오해들」, 「연극 분야에서 순수한 형태 이론에 대한 서문」, 에세이 「마약: 니코틴, 알코올, 코카인, 페요틀, 모르핀, 에테르」 등을 집필했고, 1939년 9월 18일 자살했다. 1985년 탄생 100주년을 맞이해 유네스코가 ‘비트카찌의 해’를 선포했다.

옮긴이

정보라는 연세대학교 인문학부를 졸업하고 미국 예일 대학교 러시아 동유럽 지역학 석사를 거쳐 인디애나 대학교에서 슬라브어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슬라브어권의 알려지지 않은 작품들을 번역하는 일에 힘쓰고 있다. 옮긴 책으로 보리스 싸빈꼬프의 『창백한 말』, 안드레이 플라토노프의 『구덩이』, 미하일 불가코프의 『거장과 마르가리타』, 타데우슈 보롭스키의 『우리는 아우슈비츠에 있었다』, 로드 던세이니의 『얀 강가의 한가한 나날』, 마르틴 하르니체크의 『고기』, 브루노 슐츠의 『브루노 슐츠 작품집』, 밀로시 우르반의 『일곱 성당 이야기』, 비톨트 곰브로비치의 『이보나, 부르군드의 공주 / 결혼식 / 오페레타』 등이 있다.


편집

김뉘연

디자인

김형진